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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달라졌다] 中. 중고품·대여점 인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다섯살짜리 딸 아이를 둔 주부 이정희(32.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 얼마전 한 PC통신 주부동호회에서 중고 유아용 장난감세트를 5만원에 샀다.

시중 가격이 15만원 정도니 3분의1 값에 새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구입한 셈. 이와 함께 딸아이가 타고 놀던 미끄럼틀과 장난감 자동차도 동호회에 내놓아 하루만에 처분했다.장난감 두개를 처분하고 받은 돈은 6만원. 장난감 세트 구입비를 제하고도 1만원이 남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지 6개월된 주부 김소영(30.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자기보다 먼저 아이를 낳은 친구들에게 임신복을 빌려 입고 있다.

"어떻게 남의 옷을 지저분하게 빌려입냐" 며 "차라리 싼 것이라도 사서 입으라" 고 친정어머니의 성화가 심하지만 김씨와 김씨의 친구들은 평생가야 서너달밖에 안입는 임신복을 산다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며 서로 빌려 입는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찝찝하다' 란 이유로 터부시해온 남이 쓰던 물건도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는 게 요즘 소비자들이다.그렇다고 이들이 새 물건을 살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이씨나 김씨나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는 살림규모를 갖추고 있다.

물건의 품질이 좋아져 오래 쓸 수 있게 된 것도 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두고 두고 오래 쓸 물건이 아니라면 돈을 몇푼 내더라도 서로 돌려 쓰는 게 합리적이란 소비풍조가 자리잡고 있는 것. 게다가 몇년 전부터 사회 전체에 번진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운동이나 대여문화도 이같은 소비현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수기 대여는 이미 사무실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상당히 보편화됐고, 비디오 카메라 대여도 확산하는 추세다.교체주기가 짧고 최신 모델에 대한 수요가 많은 컴퓨터와 주변기기도 인기 대여품목이다.

이런 물건은 대체로 일반인들이 사기에는 비싸고, 생활하다 보면 가끔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올 여름에는 여름 피서용품을 대여해 주는 업체들도 상당수 등장했으며 자전거.오토바이.한복.아기용품.운동용품 대여점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대여전문 사이트 이렌트(http://www.erent.co.kr)의 전성진 사장(37)은 "지난 휴가 때 텐트.코펠.아이스박스.그물망 등의 피서용품에 대한 수요가 몰려 제때 공급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며 "이번 추석에는 대여한복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고 전했다.

최근에는 집안 인테리어를 위해 한달 단위로 그림을 빌려주는 곳도 등장했으며, 각종 공구 세트와 전기 드릴.전기 인두 등을 빌려주는 업체도 나타나 생활 구석구석 필요한 물건들 대부분을 빌려 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김용자 교수의 논문 '생활용품 대여 행동에 관한 연구' 에 따르면 대여에 대해 긍정적인 계층은 30대의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취업주부들로 나타났다.또 빌려 쓰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로는 경제성(55%)과 실용성(22%)을 꼽았다.반면 부정적인 시각으로는 선입견과 인식부족.홍보부족을 들었다.

김교수는 빌려 쓰는 데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은 "경제가 발달하면서 물건의 라이프 사이클은 짧아지고 젊은 주부들 사이에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그 물건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진국형 소비방식이 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진단했다.

각 구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재활용품점과 중고품점의 활성화도 이같은 맥락이다.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재활용센터 신현국(38)부장은 "요즘 곳곳에 중고품점이 늘어나다 보니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은 중고품점으로 빠져나가 재활용품을 수거하기가 쉽지 않다" '며 "요즘 30~40대 주부들 사이에는 남이 쓰던 물건이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별로 꺼리지 않는다" '고 말했다.

유지상.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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