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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문의 새길] 4. 대동주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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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의사들의 '의권' , 노동자들의 '파업권' 주장 등의 현상에서 나타난 것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능력을 가진 당당한 '주체' 로 성장한 듯 보인다.

그러나 집단이익의 요구가 곧 주체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원의 권리주장이 전사회 구성원의 행복한 삶의 보장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부뤼크네르가 강조한 것처럼 '희생자 의식' 으로 충만된 '유아기적 행동경향'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이익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적 주체로서 등장하여 각자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난 수 백년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된 가장 큰 실천적, 이론적 과제였다.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소유권 혹은 개인적 권리의 획득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헤겔은 그것을 '승인 투쟁' 으로 개념화하였으며,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계급의식의 획득으로 정리한 바 있다.

즉 권리의식과 계급의식은 서구의 반봉건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경로로서 정식화된 바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억압에 대한 저항의 동력을 마련해 주었고 개인을 전체와 분리시킴으로써 인간을 인격체로서 '승인'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지만 개인을 상품화된 질서, 소비주의, 또는 푸코가 말한 미시권력의 올가미에 새롭게 매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 계급형성의 이론은 노동자가 피억압자에서 자유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낙관했다.

결국 이익추구형 인간관을 견지한 서구의 두 주체화 담론들은 인간을 봉건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제시하였지만,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과 소비라는 물신(物神), 쾌락주의, 미신과 광기, 정신병 등으로 인간을 새롭게 노예화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관료화 권력집단화,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사회적 소수자(minority)의 주변화, 비이성적이고 야만적 현상에 대한 집단적 무감각증 등으로 나타나면서 오늘의 문명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자기의 것' 을 되찾는 것으로서의 주체화가 아닌, 자기가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타인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획득되어지는 주체화의 이론들에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반대를 통한 '개인' 의 승인과 권익의 쟁취에 그치지 않고 반대운동을 통한 하나됨, 혹은 반대운동의 전제로서의 하나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일부 사회이론이나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미 제기한 바 있지만, 어떤 사회집단이 성숙한 사회적 주체로 자리잡는 것은 구성원인 개인이 부당한 지배질서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수동적인 저항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자신이 타인간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을 받는 존재 혹은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받을 때이다.

이것이 바로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주체화의 논리가 아닌 대동(大同)의 감각에 입각한 주체화의 논리이다.

우리는 이미 대동주체의 형성을 체험한 바 있다. 1960년 이승만 하야의 날 당시의 온 국민,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당시 시민군과 주민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공동체 의식, 그리고 가까이는 이산가족 상봉의 며칠 동안 등이 그것이었다.

그 때 범죄가 사라졌고, 사람들은 벅찬 희망과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오랜 장마 구름 뒤로 번개같이 스쳐가는 푸른 하늘처럼 극히 순간적인 것이었으나 우리는 그 속에서 추구해야 할 사회의 이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든 대동주체화의 국면은 분명히 희생을 각오한 투쟁과 저항, 그리고 참여와 자신감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나 그 바탕에는 남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을 때 강한 에너지를 발휘하는 한국 민중들의 도덕감각이 깔려있다. 그것은 권리의식과 계급의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립관계의 인식 보다 더 상위의 것은 하나됨의 인식인 것이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그리고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화 이론의 최저치(minimum)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목적론적 시각 하에 민중들을 수단화 대상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최저치에 시야를 고정시키면 실제 이들이 참여와 저항을 통해 엄청난 저항력을 드러내며, 동시에 자신의 잠재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는지 보지 못한다.

사회과학은 어떻게 인간이 권리의식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분석하는데 여전히 중점을 두어야 하지만, 동시에 '남과 하나라는 인식,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려는 요구' 가 행동의 동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주체의 형성을 단순히 개인, 혹은 집단의 이해관계 인식의 발전과정, 혹은 권력 혹은 지배질서의 정당화의 과정으로만 보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개인화 차별화, 파편화의 압력에 대한 '사회' 의 자기주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대동주체론은 서구 사회과학에서 수입한 시민사회, 사회운동, 사회갈등, 노동계급형성의 개념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여 새롭게 이론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다음은 창원대 도진순 교수의 '통일민족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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