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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김 할머니가 남긴 숙제, 언제까지 미룰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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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 사회에 ‘웰 다잉’의 화두를 던졌던 김 할머니가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숨을 거뒀다. 가족 측은 “호흡기 제거 후 환자가 편안해졌고 가족들도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었기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치료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기존 입장도 재확인했다. 이들 가족은 2008년 2월 김 할머니가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받다 식물인간이 되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소송을 냈었다. 환자가 평소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깔끔한 성격인 데다 앞서 심근경색을 앓던 남편의 연명치료를 반대한 점을 들어 뜻을 추정한 것이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가족들의 바람대로 호흡기를 제거하란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중요시하게 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를 반영한 조치였다.

이로써 오랜 세월 수많은 환자와 가족에게 고통을 가해온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어졌고 의료계 자체의 가이드라인이 잇따라 나왔다. 그러나 진전은 거기까지다. 후속 입법 작업이 지지부진한 바람에 가이드라인의 법적 타당성이 떨어져 의료 현장의 혼선은 여전하다. 연명치료 중단 대상과 방식 등을 놓고 각계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게 입법 지연의 이유다.

손 놓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 보건복지부가 지난 연말 의료계·종교계 인사 등으로 태스크포스를 꾸려 사회적 합의점 찾기에 나섰지만 아직 별 성과가 없다. 반드시 환자 본인이 문서로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과 가족에게도 대리 결정권을 줘야 한다는 주장, 식물인간은 아예 제외하자는 의견과 몇 개월 이상 식물인간 상태가 지속되면 포함시키자는 의견 간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만큼 신중을 기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논쟁만 일삼다 어렵사리 마련된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정부는 우리보다 앞서 이 문제를 풀어간 외국 사례를 참조해 합리적인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호스피스 서비스 등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인프라도 서둘러 확충해야 한다. 그게 김 할머니가 남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