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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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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된 아버지

전경순은 딸 넷에 아들 둘인 개신교 목사 집안의 딸이었다. 위로 제일 맏이가 우유부단한 아들인 오빠 경덕, 똑똑하고 남자 같은 첫째 딸 경숙, 둘째 딸은 내 어머니 경순, 셋째가 덜렁이 경심, 그리고 넷째 딸 경미는 얌전하고 얼굴도 예뻤다. 그 아래 개구쟁이 남동생 경석이 맨 막내였다.

그들의 아버지이며 내 할아버지인 전흥철은 감리교의 목사였지만 중년에 잠깐 교회 목회 일을 하다가 나이 들어서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마도 초창기의 개화파 인사들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계몽적인 민족주의자였을 것이다. 사진에서 보면 그 시대에 벌써 그는 동그란 무테 안경을 쓰고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전흥철은 평양에서 의학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주동했을 정도의 유지였다. 왜 목사가 하필이면 의학전문학교를 창설하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그때에는 병원은 드물고 아파서 치료도 못받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단다'라고 말했다. 어머니 전경순은 나에게 외할아버지의 얘기를 할 적이면 은근히 자랑스러운 감정과 원망을 섞어서 말하곤 했다.

경순은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서 평양 감옥에 수감된 아버지에게 면회 가던 일을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밤새 쌀을 찧어 장만하던 떡 보따리 얘기며, 당시의 일제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재판정에 끌려올 제는 용수라는 바구니 비슷한 것을 얼굴에 쓰고 나온다던 얘기도 했다. 전흥철은 그때 전국으로 번졌던 삼일 만세운동의 평양 주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어린 경순은 만세운동이 벌어지던 평양 거리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표들이 경성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선언문을 읽고 모두 체포된 뒤에 중심가 사방에서 학생들과 기독교 신자들이며 시골 사람들까지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데, 헌병들은 처음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색깔을 들인 백묵을 긴 막대 끝에 매어 사람들의 흰옷에 그었다고 한다. 그러면 길거리 모퉁이 곳곳에 섰던 일경과 그 앞잡이들이 등이나 가슴에 묻은 백묵 흔적을 보고 체포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달아나다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가면 사람들은 저마다 방의 다락에 숨겨 주거나 뒤꼍으로 나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당시에는 보조원과 순사보 따위들 중에 조선인이 제법 있었는데 그들이 뒤를 쫓으면 젊은이들이 달아나다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홱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야 이새끼, 넌 조선 사람 아니가?'하면 상대방은 주춤 서버린다고 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창문으로 내다보거나 대문가에 섰다가는 함께 욕설을 퍼부으면 슬그머니 뒷걸음질로 행길을 향해 물러나더란다.

그녀가 자라서 전문학교까지 진학했다가 일본 유학 길에서 되돌아와야 했던 것은 다시 아버지가 신사 참배 반대로 일제에 의하여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통산 칠년여의 옥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경순은 둘째여서 두 살 위인 언니 경숙과 언제나 다툼이 잦았다. 오빠는 맏아들이랍시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늘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여동생들에게 양보도 잘했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여학교 시절의 경숙과 경순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오히려 둘째인 경순이 동생들을 보살피거나 집안일을 도왔고 맏딸 경숙은 오빠에게도 대들고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았으며 남자 같았다.

그림 = 민정기
글씨 = 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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