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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정의 끝 멀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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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호 16면

경쾌한 티샷을 하고 페어웨이에 서니 그린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별자리 책을 뒤져보던 어린 시절, 하늘 위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저 높은 곳엔 어떤 그린이 있을지 가슴이 설렜다. 천상의 그린을 향해 샷을 하는 기분이었다. 볼은 깃대를 향해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성호준 기자의 스코틀랜드&웨일스 투어 에세이 글랜이글스<끝>

글랜이글스 킹스 코스는 나의 스코틀랜드-웨일스 여행의 종착지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고 그만큼 코스에 더 애정이 갔다. 글랜이글스는 하일랜드 초입의 내륙에 있다. 거친 바람과 잡초들로 황량한 분위기가 나는 바닷가 링크스에 익숙해진 터라 아담한 언덕과 높이 뻗은 나무들이 반가웠다.

글랜이글스 리조트는 2005년 G5회담이 열린 고급 리조트다. 킹스 코스는 90년간 내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멀리건 부부와 성호준 기자(가운데).

글랜이글스는 2005년 G8 회담이 열린 고급 리조트다. 빅토리아 건축 양식의 호텔에선 백파이프 음악이 흘러나왔고 보라, 분홍빛 헤더 등 스코틀랜드의 감각들로 넘쳐났다. 프로골퍼 리 트레비노는 “천국이 이런 곳이라면 티타임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곳엔 제임스 브레이드가 설계한 킹스, 퀸스 코스와 잭 니클라우스가 만든 PGA 센터니얼 코스가 있다. PGA 센터니얼 코스가 2014년 라이더컵을 개최하지만 글랜이글스의 간판은 킹스 코스다.

19세기 바닷가 코스(링크스)가 아닌 골프장은 B급으로 치부됐다. 브레이드는 1919년 킹스 코스를 설계하면서 바닷가가 아니라도 골프장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브레이드는 1m90cm 가까운 장신에 훌쭉 말랐다. 그의 캐리커처를 보면 동화 ‘키다리 아저씨’가 연상된다. 동화에서 고아 소녀 제루샤는 자신을 도와주는 은인 키다리 아저씨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편지를 보냈다. 킹스 코스도 그런 호기심을 준다. 그의 홀 하나 하나는 영국식 정원처럼 아늑하고, 그린은 비밀의 화원처럼 숨겨져 있다. 브레이드는 도그레그 홀을 만든 디자이너다.

1870년부터 1950년까지 80년을 사는 동안 브레이드에게 세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샷 거리가 짧았던 그가 갑자기 장타자가 된 것이 첫 번째 기적이다. 그는 “짧은 드라이버를 들고 잠이 들었는데 긴 드라이버를 가지고 깨어났다”고 말했다.

기적은 그린에서도 일어났다. 원래 퍼팅 실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홍차에 넣는 라임이 두 눈에 들어간 이후 시력까지 나빠졌다. 그러나 알루미늄 헤드 퍼터로 바꾼 뒤 승승장구했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다섯 차례 오픈에서 우승했다.

세 번째 기적은 자신의 부고 기사를 보고도 34년이나 더 산 것이다. 동명이인이 기차역에서 미끄러져 사망했는데 브레이드는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존 테일러는 신문에 제임스 브레이드와의 추억을 부고로 썼다.

따지고 보면 세 가지 모두 기적이 아니다. 처음 두 개의 기적은 샷 거리와 퍼팅 실력을 늘리려고 노력하던 그가 어느 순간 티핑 포인트를 맞은 것이다. 그는 ‘퍼팅은 노력으로는 안 되는 재능의 산물’이라는 미신을 깬 골퍼다. 노력을 우연한 기적으로 표현한 겸손이었을 뿐이다. 겸손과 품위 때문에 브레이드는 프로골퍼로는 처음으로 R&A의 명예회원이 됐다. R&A는 로열 앤드 에인션트 클럽(Royal and Ancient club)으로, 흔히 ‘영국왕립골프협회’로 소개되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1834년 윌리엄 왕이 세인트앤드루스 클럽의 역사와 권위를 인정해 이런 명칭을 내려줬다.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골프 룰과 오픈 챔피언십을 관장하는 골프의 가장 권위 있는 클럽이다.

브레이드에게 기적이 있다면 시력이 아주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미학적인 코스를 디자인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력이 나빠진 말년의 클로드 모네처럼 브레이드의 마스터피스인 킹스 코스는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 그는 눈이 나빴지만 한 번만 훑어보고도 코스를 명확히 파악했다고 한다. 시각 기억력과 상상력이 뛰어나서 그가 본 홀들은 뇌 속에서 서로 교감하고 진화했다. 90년이 지나도 킹스 코스가 스코틀랜드 내륙의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꼽히는 이유인 것 같다.

나도 기적을 바랐다. 앞으로 이런 여행의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멀리건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에게도 여행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는 멀리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킹스 코스는 티샷을 잘 쳤을 때나, 잘 못 쳤을 때 모두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위대한 코스는 어렵기만 한 코스가 아니다. 형편없는 샷을 벙커와 해저드에 집어넣어 괴롭히지 않는다. 턴베리와 카누스티, 로열 도노크 같은 곳이 그랬다. 킹스 코스도 모든 골퍼에게 적절한 재미와 긴장을 줬다.

매홀이 특이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13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다. 이 홀의 이름은 Braid’s Brawest, 브레이드의 가장 아름다운 홀이라는 뜻이다. 250개의 코스를 만들거나 재설계한 브레이드의 대표작이 킹스 코스다. 464야드(화이트 티는 448야드)의 파4 홀로 티잉 그라운드와 그린이 페어웨이보다 약간 높다. 깔때기 홀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러프엔 은은한 색감의 헤더가 피어 따뜻해 보였다. 드문드문 솟아오른 침엽수들은 홀의 구도를 안정되게 잡아줬다. 이 아름다운 홀을 실컷 음미하겠다는 생각으로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나는 브레이드의 가장 아름다운 홀에 있는 벙커 6개 중 3개에 들어갔다. 여행 중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맘을 사로잡은 홀에 대한 욕망은 버리기 어렵다. 찰스 다윈의 손자이자 브레이드의 동시대를 산 골프라이터 버나드 다윈은 “브레이드는 나쁜 샷을 모두 잡아내려는 처벌주의자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깝지만 너무 넓고 편한 길을 만들어 놓는 사람도 아니다”고 했다.

그린 옆 턱 높은 벙커에서 빠져나왔을 때 앞에서 플레이하던 부부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아일랜드에서 온 50대 후반의 여행자였는데 함께 치자고 했다. 남편인 시릴은 매우 온화했고 부인 수전은 젊었을 때 아일랜드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미인이었다.

라운드를 마친 후 그들은 자신의 성을 말했다. 놀랍게도 멀리건 부부였다. 멀리건이라는 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 함께 라운드를 했다니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라운드 중 멀리건을 하지도, 주지도 않았다. “멀리건 부부가 멀리건에 너무 인색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 라운드 도중 멀리건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샷 하나가 아니라 이번 여행 전체를 다시 할 수 있는 멀리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릴은 “원한다면 멀리건을 주겠다”고 했다. 그의 멀리건은 아일랜드 여행이었다. 그는 더블린에서 호텔을 경영하는데 재워주고 코스에 안내도 할 테니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을 한국에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시릴은 “아일랜드 링크스는 거친 맛이 있다”면서 아일랜드의 멋진 골프장들을 적어줬다. 많은 골프 관광객으로 약간 세속화된 스코틀랜드보다 아일랜드가 더 나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멀리건 부부는 나에게 또 다른 여행의 꿈을 줬다. 그들에게 신세를 질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준 꿈은 나에게는 최고의 멀리건이었다.



취재협조 영국 관광청, 스코틀랜드 관광청,
웨일스 관광청 www.visitbri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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