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근혜는 미리 선 긋지 말고, MB는 보다 정성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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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꺼내기도 전에 벽에 부딪혔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그저께 재경 대구·경북인 신년교례회에 참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원안이 배제된 안은 저는 반대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야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마저 외면하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문제를 다루는 집권당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주요 국정 현안마다 사사건건 집권당이 심각한 내부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국민 입장에선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안+α’라는 박근혜 전 대표의 의견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는 안이다. 대통령이 한마디 한다고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가 수정안을 내놓겠다고 예고한 날이 바로 모레다. 집권당의 책임 있는 중진 정치인으로서 최소한 그 내용은 살펴보고 판단하는 것이 순리다. 설사 그 안이 미흡하다고 판단되더라도 당내에서 먼저 조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서다. 대안도 내놓기 전에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묵살해서는 당을 같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세종시 문제는 국가적 과제다. 박 전 대표도 나름대로 고심을 거듭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 역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왔다는 건 박 전 대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가 걸린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이로 인해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된 상황에서 대화로 해결할 길마저 틀어막아 버리는 건 갈등을 풀어나가야 할 정치 지도자로서 올바른 자세라 하기 어렵다.

박 전 대표는 수정안을 “당론을 뒤집는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당시 당론을 만든 과정은 분명치 않았다. 또 당론을 한번 정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바꾸지 못한다는 건 지나친 고집으로 비칠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지만 자신과 다른 의견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지도자의 아량이고, 국정을 안정되게 이끌 수 있는 자세다.

정부와 한나라당 주류 측의 접근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동안 얼마나 진심으로 박 전 대표 측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는지 의문이다. 정운찬 총리가 충청도를 수차례 방문하는 등 세종시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다. 그러나 정부와 청와대가 그러한 충정 어린 노력을 박 전 대표에게도 기울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외곽의 여론을 동원하는 것으로 박 전 대표를 우회 압박하려 한다는 인상까지 주어왔다. 이래서는 박 전 대표 측을 오히려 감정적으로 자극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외교에서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해왔다. 외국 정상의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해 선물까지 직접 고를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한국에 유치하고, 아랍에미리트의 원전(原電) 건설을 수주하는 성과도 거뒀다. 국내 정치에서도 최소한 그와 유사한 노력이라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