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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 바라보기] 감격의 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는 이명증(耳鳴症)환자다.무어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귀에 들린다.쇠끼리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매미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이명증을 고치는 데 좋다면서 한 신도가 껍질 벗긴 호두를 보내 주었다.호두를 방에 두고는 오랜 기간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런데 어느 날 방에 아주 작은 나방들이 들어와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숫자는 많아지고 마침내 곳곳에 버러지까지 기어다녔다. 그 원인을 찾던 중에 호두 바구니를 열어 보니, 버러지와 나방들이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우리가 날아다니는 나방은 쉽게 알아보지만, 몸을 감춘 나방 즉 호두에서는 나방을 보지 못한다.어찌 호두에서만 나방이 나오랴. 삼라만상에서 각기 나방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움직이는 현상은 물론 살아있는 것이지만, 부동으로 있는 것, 심지어 나무와 풀과 물과 흙 같은 것도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나방 또는 생명을 품고 있다.

지난 광복절 이후 며칠간 전 국민이 같이 흐느꼈다.남북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각기 한권의 논픽션 비극 소설뭉치 그 자체였다.50년 전에 새싹처럼 예뻤던 이들이 이제는 주름진 얼굴로 나타나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외국인 기자가 그 울음을 잘 설명했다."기쁨에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참고 억눌러 왔던 슬픔에서 나오는 것" 이라고. 빛 바랜 사진을 펴놓고 지금의 늙어버린 얼굴을 맞추는 이, 치매에 걸려서 아들을 알아볼 수 없는 이, 너무 늙고 병들어서 만남의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된 이 등, 모두 안타까운 장면들이었다.

한 이산가족의 인터뷰가 인상적으로 기억난다."북의 가족들에게 가진 것 전부라도 주고 싶다."감격의 상황은 불가사의한 힘으로 마음을 열게 만든다.

한데 말이다.만남.사랑.이별.재회로 이뤄지는 감격의 요건들을 어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을 보는데서만 찾아야 하는가.

삶이란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생활이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격정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짐승도 사람과 같이 숨쉬고 살지만, 사람처럼 지속적으로 강렬한 사랑과 미움,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잘사느냐 못사느냐는, 많은 드라마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실컷 웃고 우느냐 아니면 멍하니 돌과 나무처럼 시간과 장소만 점유하다가 죽느냐에서 결정될 것이다.

드라마가 좋기는 하지만 저 '나방' 과 같이 현실로 완전히 펼쳐 놓으려고 하면 자신과 남을 다치게 할 수가 있다.

감격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든지 남북이 갈라서게 해서야 되겠는가.구체적으로 펼치지 않고 '호두' 그 자체에서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산하 대지를 다치게 하지 않고도 그 안에서 끝없는 스토리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그러면 아무리 감격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가 선사에게 묻는다."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 스승은 "뜰 앞의 잣나무" 라고 답한다.한그루의 나무로부터도 진리 또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감격의 대상은 바로 눈 앞에 있다.꼭 돈과 권력이 있어야 보이는 것도 아니다.흔하게 널려있는 '호두' 들을 보면서 실컷 감격하자.

석지명(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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