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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기획-세계의 한복판으로<7> G20시대Ⅱ-선진국으로 가는 ‘5대 어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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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한국 경제는 1995년 이후 15년째 1인당 국민소득(GNI) 1만 달러대의 덫에 갇혀 있다. 2007년에만 2만 달러를 간신히 넘었을 뿐이다(2만1695달러). 수천년 만에 변방에서 복판으로 걸어 나왔지만 선진경제에 이르려면 한참 남았다.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문화 곳곳에 과제가 산적해 있다. 중앙일보는 경제 업그레이드를 위해 올해 꼭 해야 하는 어젠다 5개를 제시한다.

1월드컵·올림픽보다 홍보 효과 커
국가 브랜드 높이자

30달러짜리 국산 넥타이. 이게 150달러에 팔리는 경우가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를 붙이면 그렇다. 이게 ‘국가브랜드’의 힘이다. 명품 브랜드에 ‘웃돈(프리미엄)’이 붙듯 국가브랜드가 좋아지면 그 나라 사람도, 경제도 대접이 달라진다.

그러나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갈 길이 멀다.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와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12월 공동 개발한 모델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종합 19위에 그쳤다.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60년 만에,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세계인의 가슴을 충분히 파고들진 못했다.

수출 10위권의 무역강국, 국제특허 출원 건수 세계 4위의 기술강국이지만 ‘코리아’라는 브랜드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에도 뒤져 있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는 이미지가 실체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국가브랜드 개선 노력이 절실하다”며 “1999년 이후 국가 전략으로 추진해 브랜드력을 크게 높인 그리스와 뉴질랜드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첩경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굿 뉴스’다. 전문가들은 G20 정상회의가 월드컵이나 올림픽보다 더 큰 홍보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최정화 외국어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는 “ G20 정상회의는 한국의 매력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라 고 말했다.

2 금융사 체질 바꾸고 해외진출을
금융도 국가 브랜드 높이자 메이저리거로 키우자

지난해 3분기 세계 시장에서 팔린 TV 세 대 중 한 대는 삼성·LG 브랜드를 달았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유일하게 판매 대수를 늘렸다. 반도체·LCD·조선·원자력발전소 등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이미 메이저리거다.

하지만 ‘경제의 핏줄’이라는 금융산업만은 유독 우물 안 개구리 신세다. 지난해 세계 100대 은행(자기자본 기준)에 낀 국내 은행은 단 세 곳. 일 년 새 두 개나 줄었다.

금융위기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선진국 금융사들이 흔들리고 국제 금융계의 새 판 짜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노무라 홀딩스는 이 찬스를 잡아 위상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2008년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유럽 부문을 인수한 노무라는 지난해 3분기 277억 엔의 전체 순이익 가운데 75%를 해외 시장에서 거둬들였다. 2008년 100위권 밖에 머물던 런던증권거래소에서의 주식거래 비중은 지난해 6월 3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한국 금융회사들은 움츠러들었고, 100년 만에 섰다는 큰 장은 닫히고 있다.

먼저 금융회사들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때마침 금융산업 빅뱅의 호기가 무르익고 있다. 우리·외환·기업은행 등 초대형 매물들이 나올 태세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동국대 경영학과 강경훈 교수는 “ 글로벌 금융사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인적 자원과 영업 기반을 확충해 왔음을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3 고용창출 많은 ‘제2 벤처 붐’ 절실
벤처정신 살리자

한국의 벤처기업 수는 2008년 말 1만5401개에서 지난해 10월 말 1만9080개로 늘었다. 열 달 만에 3679개가 더 생겼다. 숫자만으론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같은 벤처 창업 붐이 일어난 듯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3679개 중 93.7%는 기존 중기가 벤처 인증을 받은 것이다. 새로 창업한 벤처는 6.3%뿐이다.

벤처는 외환위기 직후 한국 경제에 재도약의 활력을 불어넣은 1등 공신 중 하나다. 게임과 인터넷 산업 등을 새 성장 엔진으로 키웠다. 성공 신화의 꿈에 부푼 젊은 벤처 창업자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일자리를 늘렸다.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고 고용 문제로 신음하는 지금 한국에 ‘제2의 벤처 붐’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현실은 벤처 창업에 우호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투자 패턴을 바꾸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뒤 벤처캐피털들은 기술과 가능성을 가진 창업 벤처를 외면하고, 안정 궤도에 오른 곳에 투자했다. 이로 인해 2000년 5493억원이던 앤젤 투자(창업 투자) 규모는 2008년에 492억원으로 줄었다. 창업 초기 벤처들이 돈 구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벤처기업협회 김영수 정책본부장은 “‘최선을 다한 실패’에는 재도전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면 벤처 창업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4 글로벌 기업 유치 막는 장벽 제거
경제자유구역 벤처정신 살리자 제대로 하자

2년 전 영국의 한 명문 사립학교가 인천 경제자유구역청을 찾았다. 유치원에서 고교 과정까지 가르치는 국제학교를 세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비영리 학교법인만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규제에 막혔다. 명색이 경제자유구역인데 서비스업의 대표적 분야인 교육기관 유치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인천 경제자유구역청의 김충진 정책조정팀장은 “비영리 법인 규제가 풀려도 이익을 본국에 송금할 수 없게 한 규제에 걸려 해외 명문 사립을 유치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자유구역은 유수의 글로벌 기업을 유치해 하이테크·서비스 분야의 동북아 허브로 가꾸겠다는 목적으로 정부가 2003년부터 지정했다. 정부는 여기에 들어오면 세금 감면 같은 각종 혜택을 주겠다며 외국 기업과 병원·학교 등에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규제에 묶여 유치가 순조롭지 않다. 영리 의료법인이 들어올 길은 여전히 막혀 있고, 분양가상한제 등은 외국 부동산 개발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대로는 ‘동북아 허브’가 일장춘몽으로 끝날 수 있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정부는 각종 규제를 푸는 것을 추진 중이지만 국회가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여론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고려대 강성진(경제학) 교수는 “경제자유구역을 제대로 하려면 일단 각종 규제를 과감히 풀어 보고 부작용이 생기면 나중에 바로잡아 가는 것이 바른 수순”이라고 말했다.

5 한국투자공사 규모 더 키워야
국부펀드 키우자

중국 국부펀드인 CIC는 지난해 6월 모건스탠리 보통주를 12억 달러어치 사들였다. 이어 7~9월엔 카자흐스탄 석유가스 업체에 9억3900만 달러를 투자했고 11월엔 미국 발전설비 회사인 AES 지분 15%를 15억8000만 달러에 취득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은 지난해 5월 6억 달러 규모의 중국건설은행 지분을 사들였다.

지금 세계는 국부펀드들의 전쟁터다. 자원 확보 등 큰 국가 전략에 따라 종횡무진 뛰고 있다.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는 보고서를 통해 “향후 국제 자본시장의 패권은 아시아와 중동 지역 국부펀드에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규모도 확대일로다. 도이치뱅크는 2015년 세계의 국부펀드 규모가 10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는 덩치도, 움직임도 작다. 올해 정부에서 50억 달러를 추가로 위탁받아야 340억 달러가 된다. 전체 국부펀드의 85%가 1000억 달러 규모 이상인 현실에서 이 정도론 주류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국내에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외환보유액은 2699억9000만 달러, 올해는 더 늘어난다. 연세대 김정식(경제학과) 교수는 “ 외환보유액의 20%대(약 700억 달러)까지 늘릴 만하다”고 말했다. 자본시장연구원 김민석 연구위원은 “KIC의 투자를 정부의 국가 전략과 긴밀하게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상렬·권혁주·서경호·최현철·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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