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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문의 새 길] 1. 신유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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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학계가 변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서구 이론을 수용, 이식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를 한국사회와 효과적으로 접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 결과 세계가 주목 할만한 자생적이며 독창적인 이론도 등장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15개의 주제와 인물로 엮어 시리즈에 담는다.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연대. "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 에서 시민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말은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줄어든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타당하다.

최근 사회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유산을 생산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치적 이념이다.

자본주의가 보편화한 현대사회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더 이상 사회 전체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가 아무리 성공적이라고 할지라도 공동체의 매력과 유대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없으며,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이 아무리 신랄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궁극적으로는 '자유' 가 보장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인간 상호간의 연대와 공동체에 대한 욕구가 더욱 더 강해진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현대인들은 모두 공동체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우리는 어떻게 자율적 주체로서의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 공동의 가치를 보전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전자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로부터 출발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자유주의라면, 후자는 공익과 공동선(善)을 먼저 생각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이란 목표에서는 대립적이기는커녕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사회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는 극단적 개인주의를 경계할 뿐 결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경시하지 않는다.

공동체주의의 내용이 이처럼 친근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분열돼 있다.

자유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를 이 땅에서 거론하는 것은 유행에 민감한 서양 추수주의(追隨主義)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유교적 전통의 폐해가 청산되지 않은 마당에 서양에서 제기된 '관계윤리(ethics of care)' '공동체주의' 를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권위주의의 탄생을 부채질할 수 있다고 질타하기도 한다.

서양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적 일 수 있는 낱말인 '공동체' 가 우리에게는 지극히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는 개인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족.혈연.학연.지연.민족과 같은 유대관계를 특별히 강조하는 공동체주의는 전통 사회의 억압적 구조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나는 제사가 싫다" 는 식이다.그러나 우리는 공동체라는 낱말을 두려워하고 또 입에 올리기는 꺼려하면서도 여전히 공동체 지향적으로 살고 있다.

'유가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공동체주의는 우리의 가슴, 문화와 삶의 형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공동체주의라는 낱말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관계' 를 중시하는 유가적 전통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 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사상이 가부장제와 결합함으로써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권력' 을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한국 현대사회의 병리적 원인으로 지목하는 연고주의 역시 권력에 의해 오용된 유교주의의 산물이다.문제는 공동체 지향적인 유교사상 자체가 아니라 유교와 권력의 유착관계다.

유교가 모든 관계를 지배하였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리고 전통문화는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비록 유가적 가치에 의해 구성되고 있지만 우리의 사회관계는 민주적 원리와 가치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포스트(post) 유교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사회의 분화로 말미암은 개인화의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화 시대에 문화적 정체성을 보전하려면 우리의 가슴과 전통 속에 깊이 심어진 공동체주의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공동체주의를 개인과 공동체를 정의롭게 결합시킬 수 있는 정치적 이념으로서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문화전략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물론 우리는 서양의 공동체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극단적 개인주의의 병폐를 경험한 서양인들이 여전히 개인의 권리와 자유로부터 출발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집단적 권위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겪었던 우리는 의미를 아직 상실하지 않은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다른 문화에 의해서도 민주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동체적 윤리를 우리의 전통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유가적 가치를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권력관계로부터 분리시켜 자율적 유대관계의 토대로 변형시킨다면, 우리의 공동체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진보적 전통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진우<계명대 철학과 교수>

◇ 다음은 서울大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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