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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현대사] 下. 60세이상 이산 1세대 69만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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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 .

40대 초반의 여인이 피켓을 들고 한 여름의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의도 '만남의 광장' 에 서 있었다.

6.25전쟁 당시 어렵사리 38선을 넘어 남하했지만 부산행 피란열차 안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맞은 편 '찾음의 벽보' 에는 39세의 한 청년이 '1.4후퇴 당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던 중 손을 놓쳐버린 세살 위의 누나를 찾아달라' 고 쓴 글이 적혀 있었다.

1983년 여름은 여느 해 여름보다 뜨거웠다. KBS가 주관한 '이산가족 찾기운동' 이 시작되자 여의도 '만남의 광장' 은 헤어진 혈육을 찾으려는 이산가족들과 각종 사연이 담긴 벽보의 물결이 넘쳐났다.

KBS 등 언론기관이 70~80년대에 전개한 이산가족 찾기운동은 남한 내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수백건이나 성사시켰다. 그러나 남과 북에 흩어져 있는 이산가족 문제는 제대로 풀지 못했다.

◇ 상봉 둘러싼 남북간 견해차〓남북 적십자사가 이산가족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71년 8월이었다.

불과 5개월 전 주한 미7사단이 철수하고 미.중간 화해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긴장완화의 파장이 급기야 남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양측은 25차례의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72년 8월 제1차 적십자 본회담을 열 수 있었다. 한달 전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남북한은 73년 7월 제7차 본회담이 열릴 때까지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

우리측의 '추석 성묘방문단' 제안에 대해 북측은 '회담 진전을 방해하는 것' 이라며 거절했다.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우리측 입장과는 달리 북측은 월남한 사람들을 '배신자' 로 인식, 이를 민감한 정치문제로 받아들였다.

양측의 입장차는 끝내 좁혀지지 않아 회담개시 4년9개월만인 76년 6월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 85년 9월 첫 이산가족 상봉〓80년대 들어서도 남북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83년 10월 '버마(미얀마) 아웅산사건' 이후에는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84년 3월 북측 제의에 따라 남북 체육회담이 잇따라 열리고 그해 9월 북측의 수재물자를 남측이 받아들임으로써 대화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남북 적십자 8차회담이 회담결렬 9년만인 85년 5월 서울에서 재개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올려졌다.

양측은 두차례의 실무접촉을 거쳐 그해 9월 '이산가족 교환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동시교환에 합의하게 된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한 주민 50명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남북한 밀사들의 물밑 접촉이 이산가족 상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측의 장세동(張世東)안기부장.박철언(朴哲彦)안기부장 특보, 북측의 허담(許錟)노동당 대남비서.한시해(韓時海)당 부부장이 접촉 포인트였다.

북측 인사들은 상봉 행사 보름전쯤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단 40년만의 첫 상봉은 일회성으로 끝나 비통과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86년 1월 북측이 팀 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모든 남북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했기 때문이다.

◇ 제3국 상봉〓이산가족들은 정부 채널을 통한 상봉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89년 6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지침' 발표를 계기로 제3국 상봉에 나서게 된다.

중국 옌볜(延邊)이나 일본 도쿄(東京) 등이 상봉 장소로 이용됐고 민간 상봉 주선단체들이 중개자로 나섰다.

89년 6월부터 올 6월까지 제3국 상봉은 모두 5백40건이었으며 이중 중국 5백20건, 일본 16건 등 중국이 주무대로 활용됐다.

같은 기간의 다른 통계를 보면 ▶생사확인 2천1백48건▶서신교환 5천7백74건▶접촉신청 1만5천38건 등이었다.

통계는 이산가족 1세대인 고령자들이 갈수록 조바심을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일부와 주선 단체들에 따르면 통상 ▶생사확인에 5백~1천달러▶편지교환 1천달러▶상봉은 8천~1만5천달러 정도의 비용이 각각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독일 통일의 교훈〓독일의 통일은 이산가족 상봉과 인적 교류가 가져다 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서독은 분단으로 인한 이질화 극복 수단으로 개인간 상호왕래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72년 기본조약 체결 이전부터 이산가족의 상봉을 허용했다.

47년 이후 서독인 8명 중 1명이 정기적으로 동독을 방문했으며 5명 중 1명은 편지.소포를 교환하는 등 교류가 이어졌다.

특히 63년 체결한 동.서독간 '통행사증협정' 은 남북간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당시 협정은 이산가족 재회 범위를 동베를린, 시간적으로는 15일간, 인적으로는 친척 방문에 한정시켰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해 이산가족 상봉장소를 '서울.평양' 으로, 시간을 '일정기간' 으로, 상봉대상을 '부모.형제' 로 각각 국한해 추진할 만하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 1세대 가운데 60세 이상이 69만명, 70세 이상이 26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통 크게'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이산가족들의 여망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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