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헌법재판소가 고치라 한 법령 19건 깔아뭉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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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선거 제도와 관련된 법 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결정을 했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는 5억원의 기탁금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내야 한다’는 법 규정(공직선거법 264조2항)이 너무 과하다”고 밝힌 것이다. 2007년 대선에 출마한 당시 장기표 전 새정치연대 대통령 후보가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다. 헌재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공무담임권 행사의 기회를 비합리적으로 차별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입법자가 2009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개정할 때까지 조항은 계속 적용시킨다”며 단순 위헌이 아닌 ‘헌법 불합치’ 결정을 했다. 위헌성이 있더라도 법 공백과 입법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2009년 말까지 국회는 이 법을 바꾸지 못했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었지만 법은 통과되지 않았다. 새해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 상황 속에서 위헌적인 규정이 방치된 것이다. 당장 대통령 선거를 치를 상황은 아니지만, 한국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법률이 효력을 잃은 조항 때문에 공백 상태가 된 셈이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에게 요구할 기탁금의 규모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가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개정 시한을 어긴 법률은 모두 4개 조항이다.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가 방송 광고의 판매 대행을 독점하게 한 방송법 조항과 시행령도 지난해 말까지 개정됐어야 한다. 2개 법률을 포함해 2개의 방송법 시행령도 개정 시한을 넘겨 효력 없는 법 조항들이 버젓이 법전에 남아 있는 것이다. 헌재 관계자는 “법을 만드는 국회가 헌법재판소의 개정 시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국회가 법치주의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논란을 촉발했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야간옥외집회 금지 부분에 대해선 지난해 9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지만 개정안 처리가 미뤄지면서 법 적용을 놓고 법조계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헌재가 ‘단순 위헌’ 결정을 한 법률 조항도 국회에서 방치되고 있다. 헌재에 따르면 위헌 결정이 내려진 15개의 법 조항도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등의 피의자에게 구속 기간을 두 차례 더 연장하게 할 수 있게 한 국가보안법 조항은 1992년 단순 위헌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18년째 개정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다.

숙명여대 박재창(행정학) 교수는 “한국의 국회가 헌재의 결정마저도 따르지 못하는 취약한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국회가 다수결의 함정에서 벗어나 헌법 정신을 구현하는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헌법불합치=헌법재판소가 심판 대상 법률에 대해 사실상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곧바로 위헌 결정을 했을 때의 법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법을 존속시키는 변형 결정. 개정 시한을 넘기면 해당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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