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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김정희, 살아있는 금석학으로 연경을 사로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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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12면

추사 김정희의 초상 2008년 우현(又玄) 송영방(宋榮邦) 선생이 기존의 초상화를 참조해 추사의 제주도 유배 시절 모습을 표현한 초상화다. 추사의 초상은 이한철(李漢喆)·허련(許鍊) 등이 남긴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젊은 분의 이름과 호, 그리고 관직이 어떻게 됩니까?”
“제 이름은 정희(正喜), 자는 추사(秋史), 호는 보담재(寶覃齋)입니다. 지난 10월에 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옹담계(翁覃溪:담계는 옹방강의 호)를 아십니까?”
“저는 이번 여행에서 담계(覃溪)를 뵙고 소재(蘇齋)에 올라가 소동파의 초상을 알현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 어른과 좋은 인연이 많습니다. 10년 전 꿈에서 이 어른을 뵙고, 이번 여행에서 만나 뵈었는데 과연 꿈속의 그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어른의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서재에 ‘보담재(寶覃齋)’란 편액을 걸었습니다. 마치 이 어른이 보소재(寶蘇齋)라 한 것과 같습니다.”
“아주 특이한 일이군요. 문인들이 이른 나이에 출중한 데에는 그 내력이 있는가 봅니다.”
“저는 독서를 아주 좋아하는데, 경설(經說)에 더욱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완운대(阮雲臺:운대는 완원의 호) 선생과 옹담계 선생을 만나 뵈어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어둠이 걷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일정이 촉박해 그 깊은 곳을 모두 알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9세기 글로벌 인간, 추사 燕行 200주년

200년 전 스물네 살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청나라의 어느 학자와 나눈 필담(筆談)의 일부다. 1810년 1월 김정희는 청나라 연경(燕京)에 머무르고 있었다. 연행사절단의 부사(副使)가 된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지 연경을 누비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꿈꾸던 여행이었다. 그에게 연경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박제가 등 선배들을 통해 이미 연경 지식인들에 대해 훤히 알고 있던 터였다. 추사는 그들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너무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추사를 환대해 주었다.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완원(阮元)을 만나 경학에 관해 열심히 질문했다.

하지만 귀국할 날짜가 다 되도록 김정희는 마지막 소망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옹방강(翁方綱)을 만나는 일이었다. 김정희는 옹방강에 대해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옹방강의 글씨를 너무도 좋아했던 추사는 그의 글씨를 수집하기까지 하였다. 자신의 서재 이름도 보담재(寶覃齋)라 하였다. 옹방강이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를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라 했던 것처럼 자신이 옹방강을 흠모한다는 의미로 그랬던 것이다. 또 10년 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옹방강을 꿈에서 만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연경까지 와서 그를 만나지 못했으니 김정희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시 옹방강은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사람들을 잘 만나주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 조선에서 온 젊은이를 만나주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럴수록 김정희는 초조해졌다. 언제 다시 연경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다시 온다 해도 옹방강이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다행히 추사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소망은 이뤄졌다. 부친은 물론 연경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의 힘으로 추사는 1810년 1월 말 옹방강의 서재인 소재(蘇齋)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추사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옹방강을 본 추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10년 전 꿈에서 만났던 바로 그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옹방강의 서재는 온갖 보물들로 가득했다. 옹은 그 보물들을 꺼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추사는 그날의 광경을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너무도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사가 연경에 머문 기간은 두 달이 채 안 되지만 추사의 연행이 조선 학예(學藝)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는 큰 사건이 될 줄은 추사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문사들, 추사를 알아야 상대해줘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고 귀국한 추사에게 어느 날 편지가 날아들었다. 옹방강이 보내온 편지였다. 추사는 뛸 듯이 기뻤다. 젊은 추사로서는 감히 옹방강에게 편지를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60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옹방강이 먼저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후 추사는 해마다 왕래하는 사신단을 통해 옹방강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청나라 학술의 정수를 전수받는다. 추사는 과거(科擧)도 뒤로 한 채 옹방강의 지도를 받으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는 훗날 추사 학문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그러던 1818년 3월 하순 옹방강의 부음(訃音)이 전해졌다. 추사와 옹방강이 만난 지 9년 만이었다. 추사는 다음 해 과거에 급제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청나라 학술의 정수를 흡수한 추사는 어느덧 북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단 한 차례의 연행밖에 하지 않았지만 섭지선·유희해·오숭량·왕희손·주학년·장목 등 수십 명의 청나라 학자들과 편지를 통해 교유하면서, 추사는 이제 조선의 추사가 아니라 국제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경에서 추사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추사를 알아야만 이야기 상대로 삼을 정도였다. 조선 사신들이 오면 추사와 잘 아는 사이인지 묻곤 했다. 역관(譯官)들도 추사와 잘 아는 사람들만 대접받는 지경이 되었다. 청나라 지식인들이 추사에게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추사가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金石學者)였기 때문이었다. 금석학은 옛 비석이나 쇠붙이 등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학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조선 금석문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추사의 금석문 연구는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추사의 학문적 성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추사와 교유하기를 희망했던 이유다.

조선 지식인들은 책을 통해서만 중국 지식인들을 만나왔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가 살아있는데도 그를 직접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저자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후 그들의 저술이 출판돼 조선으로 수입되면 그때서야 ‘훌륭한 학자’라며 야단법석을 떨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북학(北學)이 유행하면서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미 사망한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저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직접 만나서 그들의 생각을 확인하려 했다. 북학은 이미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상당수의 조선 지식인은 북학에 동조하면서 청나라 지식인들의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김정희는 바로 그 북학을 집대성한 ‘북학의 종장(宗匠)’이었다. 추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19세기 북학의 본류를 이해할 수 없다.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은 추사를 이렇게 노래했다.

요즘 조선에선 북학이 유행인데
(海東近日善北學)
그중 김 선생이 명성을 날린다네
(又有金子聲名揚)

8일부터 ‘추 보는 열 개의 눈’ 전시
추사의 학문은 서화·금석학·고증학·시론·감상학·경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추사의 이런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전시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서화(書畵) 중심이었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만 주목받아온 것이다. 여기에는 추사가 제대로 된 저술들을 남기지 않은 이유도 작용했다. 추사는 스스로 두 차례나 저술들을 불태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시문 몇 편과 제발(題跋), 그리고 편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추사를 제대로 보려면 서화뿐만 아니라 추사라는 인물이 만들어지기까지 영향을 준 ‘정체’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추사는 결코 어느 한순간 갑자기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또한 추사를 단순히 김정희라는 개인의 호(號)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추사는 ‘연행’과 ‘북학’으로 압축되는 19세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추사를 통해 19세기의 학문과 예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뿐 아니라, 그의 학문도 조선 역사에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와 지식, 그리고 사유의 틀을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추사는 위대한 ‘창조적 인간’이다.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해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정수를 되살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특히 외래문화를 추사처럼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정신을 담아낸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추사의 그런 시대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고, 우리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200년 전 세계인으로 살았던 추사 김정희의 정신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다.



박철상 공동대표는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집안 대대로 한학을 공부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우리 옛 전적(典籍)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시대 장서인(藏書印)과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학문에 대한 연구물들을 발표했다. 논문으로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 ‘추사 김정희의 저작 현황 및 시문집 편간에 대하여’ 등 20여 편이 있고 『세한도』를 썼다. 8일부터 3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화봉갤러리에서 열리는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회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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