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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맥없이 주가상승 '요행' 만 고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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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여야가 날치기 파동으로 대치 중인 정국 만큼이나 경제도 풀리지 않고 있다.

기업과 상인들은 여름장사가 신통치 않아 고민이며, 증시는 더위를 먹은 듯 비실거리고 있다.

한국의 간판기업 가운데 하나인 현대건설의 투기등급 판정에 쇼크를 받은 자금시장에서는 돈이 돌지 않고 있어 크고 작은 기업들의 '부도 괴담' 이 끊임없이 돌고 있다.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10조원 채권펀드 조성 등 시장 안정대책은 힘을 전혀 못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들이 불안감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지표는 좋지만 체감경기는 냉랭〓체감경기가 반영되는 백화점 세일이 지난해만 못하다.

외환위기 이후 세일 때마다 매출액이 10% 이상 신장했지만 이번 여름세일 매출은 증가율이 한자리에 그쳤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지난해보다 1% 신장에 그쳤고, 현대백화점 무역점은 오히려 4% 감소했다.

재래시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동대문.남대문 재래시장은 6월 이후 매출이 지난해보다 30% 줄었고, 두산타워.밀리오레 등 신흥 쇼핑몰도 침체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용산 전자랜드21 가전담당 박만수(30)팀장은 "에어컨 특수 외에는 TV.냉장고 등 일반가전제품 매출이 지난해보다 20% 줄었다" 며 "오는 10월 신혼철이 오기까지는 고전할 것 같다" 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수도권담당 노병용 상무는 "6월 중순부터 일부 대기업의 유동성 문제 등 자금사정이 나빠지면서 여름세일이 영향을 받아 소비위축으로 나타났다" 며 "하반기에도 실물경기 둔화로 매출이 한자릿수 신장에 그칠 것 같다" 고 내다봤다.

그러나 지표상으론 경기가 급격히 곤두박질하는 상황은 아니다.

정부나 민간 연구기관들은 대부분 아직도 경기정점에 이르진 못했으며, 경기 상승세가 둔화되는 과정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물경기와 경기지표간의 이같은 괴리는 기본적으로 경제의 부문별 양극화 때문이다.

반도체.자동차 등 일부 수출주도 업종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다른 전통 제조업체들은 겨우 외환위기 이전을 회복한 상태다.

특히 서민들의 일자리와 직결된 건설경기는 아직 외환위기 이전의 70% 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도 연봉.계약직 확산으로 항상 불안해하고 있다.

◇ 자금은 왜 안도나〓은행이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은행들은 2차 구조조정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BIS)자기자본비율을 높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BIS비율이 8%를 밑돌면 퇴출 위기로 직결되는 까닭에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한사코 신규대출이나 만기연장을 꺼린다.

건실한 대기업인 A사의 자금담당 金모 상무는 "금융기관들이 삼성.LG.SK.롯데를 제외하곤 돈을 내줄 자신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은행들이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이 회사채나 기업어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사줄 수 있는 투신사와 종금사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용등급 하락은 이런 자금시장에 추가된 악재다.

대형 투신운용사 채권담당 임원은 "현대계열사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채권시장이 다시 위축되고 있다" 며 "A등급 회사채가 아니면 거래가 잘 되지 않으며 투자등급인 BBB 등급도 선별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 이라고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양세영 금융팀장은 "기업들이 외환위기가 닥치던 1997년 대량 발행한 회사채의 만기 물량이 올 하반기에만 약 30조원에 이르러 자금시장을 압박하고 있다" 며 "이로 인한 자금경색이 내년 초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 더위 먹은 증시〓주식시장은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대책으로 자금이 몰려들 것이란 기대가 무산되면서 극심한 수급 불균형에 빠진 데다 심리적 불안까지 가세해 빈사(瀕死)상태에 빠져 있다.

한국투자신탁의 이혁근 마케팅팀 차장은 "최근 비과세 수익증권으로 7천억원 안팎의 자금이 들어왔지만, 주식도 일부 편입되는 혼합형에는 20억원이 들어온 게 고작" 이라며 "주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투자자들이 고개를 저을 정도" 라고 털어놓았다.

여기에다 반도체 경기가 정점을 지났느냐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면서 외국인투자자마저 삼성전자.현대전자를 집중적으로 팔아치우고 있다.

최근 거래량과 거래대금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은 외국인과 데이 트레이더들이 여름휴가 등의 사유로 시장에서 한발 물러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유리자산운용의 박용국 이사는 "더이상 눈가리고 아웅식의 미봉책으로는 시장불안을 수습할 수 없는 만큼 시장원리에 따라 과감하게 정리할 곳은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 이라고 강조했다.

◇ 정부의 고민〓시장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아 웬만한 처방은 '약발' 이 듣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지난달 10조원의 채권투자펀드며 비과세상품 허용 등 정부가 내놓은 자금시장 안정대책은 '관치' 논란과 함께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 속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헌재(李憲宰)재경부장관은 25일 "현대의 속사정은 괜찮은데 시장이 외면하는 게 문제" 라며 "정부가 나서서 문제없다고 해도 믿지 않는 실정" 이라고 답답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불신의 1차 원인은 정부에 있다. 공적자금 조성 등 부실치유의 근본 대책은 없이 임기응변식 처방만 되풀이한 데다, 잦은 정책.말 바꾸기로 시장불신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개각설도 정부의 운신 폭을 더 좁혀놓았다.

李장관은 이날 '고통분담론' 을 다시 꺼냈다. 그는 특히 현대그룹 문제를 겨냥, "대우 때처럼 시장참여자들이 제몫찾기에 급급하다간 시장이 무너진다" 며 "(채권단은)돈을 빌려준 책임을 지고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 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시장불안 해결을 위해 앞으로 신속한 부실기업 퇴출 등 앞으로 예측가능한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계획이다.

또 10조원의 채권전용펀드가 다 소진되면 추가로 10조원의 기금을 더 조성할 수 있도록 보증규모도 늘려줄 예정이다.

그러나 대우에 이어 현대사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장불안을 완전히 잠재우려면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대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금융은 동전의 양면이어서 한쪽의 부실을 방치하면 다른 쪽이 곪게 된다" 며 "재원이 한정돼 있는 만큼 기업이든 금융기관이든 부실회사는 신속히 퇴출시키되 살릴 곳은 집중 지원하는 선택적 처방이 시급하다" 고 말했다.

경제부.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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