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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기행] 1. 아테네-국립고고학박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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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유럽여행은 이제 먼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의 도시들, 또는 박물관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겨진 역사와 문화를 되새겨보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것은 이런 아쉬움을 덜기 위해서다.

어느 도시든, 그 도시안에 있는 어느 박물관.미술관이든 알고 보면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좀 많겠는가. 그 길잡이를 미술평론가 이주헌씨가 맡고 나섰다.

이주헌씨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현재 갤러리 아트스페이스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씨는 교육방송(EBS)의 '청소년 미술감상' 의 진행자며 예술의 전당 아카데미홀 등 각종 단체의 문화기행 가이드로도 활동중이다.

유럽 등 세계각지의 주요 문화유적을 찾아 20여회 답사를 다녀왔으며, 답사경험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내마음속의 그림' '미술로 보는 20세기' 등 여러 책을 썼다.

통념을 깨라. 아테네에 들어선 이에게 이 도시가 건네주는 말이다.

여름에 그리스를 방문하는 이는 풀이 누렇게 말라버린 모습에, 겨울에 그리스를 방문한 이는 산천초목이 짓푸르게 성장한 모습에 의아해 한다. 뜨겁고 건조한 여름과 포근하고 다습한 겨울이 빚어낸 조화다.

우리나라보다 더한 산악국가여서 국토의 4분의 3이 산인 땅. 산도 돌산이 많아 예부터 나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척박한 땅이 어떻게 서양문명의 수원지가 됐을까.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그리스인들은 채이는 돌을 깨뜨려 서양예술의 기초를 놓았고, 없는 나무는 수입해와 그걸로 배를 만들어 지중해 일대를 제패했다.

오체불만족? 그리스는 조상 탓, 환경 탓, 조건 탓 하는 이들이 가서는 안 될 곳이다.

통념을 깨는 사실 또 하나. 우리는 잘생긴 사람을 보고 "그리스 조각 같다" 고 한다. 그러면 옛 그리스인들 또한 그렇게 완벽하게 잘생겼을까□ 골상학적 연구에 따르면 옛 그리스인들은 땅딸보에 '숏다리' 였다고 한다.

그리스 조각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그리스인들이 오늘날의 '슈퍼 모델' 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전형적인 서양의 미남.미녀상을 만들었다.

그리 잘나지 못했기에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가 유럽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끄는 나라의 하나가 된 것은 바로 이 '잘난 조상들' 덕이다.

그리스를 찾는 이는 지중해의 햇빛뿐 아니라 위대한 문명의 날빛을 사모해 가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를 충일하게 느낄 수 있는 여름이 가장 선호되는 방문의 계절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아테네로 가는 이는 꼭 수영복을 준비해야 한다.

지중해의 햇빛이 자아내는 그 파란 바닷물의 유혹을 어찌 이길 것이며(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땅끝 수니온까지 이어지는 70㎞의 해안을 아폴로 코스트라 부르는데, 물이 믿을 수 없이 맑고 푸르다), 고대의 신화가 빚어내는 그 상상의 무지개빛 바다에 어찌 깊이 젖지 않을 것인가?

선박왕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할 때 그녀를 배에 태우고 아테네로 오면서 헬리콥터로 카네이션을 엄청나게 뿌렸다고 한다.

꽃을 받으며 바다에서 탄생한 여인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 그녀는 그렇게 아프로디테(비너스)가 됐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가 바다에서 태어날 때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직접 마중나가 그녀를 맞아준 것은 지금 막 탄생한 존재가 봄의 여왕, 곧 꽃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신화가 늘 이렇게 낭만적으로 만나는 '아테네는 '문화여행자' 의 최고 가는 순례지가 아닐 수 없다.

공해와 소음, 택시의 바가지 요금에 시달려도 아테네는 좋다.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유럽 카페 문화의 원천이 된 고대의 시장 아고라 등을 돌면서 그리스 문명의 원대한 이상에 젖은 이들이 그 문명의 섬세한 감각과 감수성을 느끼려 찾는 아테네의 또 다른 명소가 바로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다.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가 말한 소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가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 의 자취가 진하디 진하게 다가오는 유서 깊은 전시공간이다.

"도대체 프락시텔레스는 어디서 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

아프로디테 여신이 기원전 4세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자신의 상을 보고 놀라 내뱉은 말이라고 한다.

고대 문명 가운데 유일하게 완벽한 사실주의 미술을 탄생시킨 그리스 문명. 그 탁월한 성취는 박물관 곳곳에서 지금도 뜨거운 열기를 발한다.

그러기에 이 박물관의 여러 신상들이 다 "이 예술가들은 도대체 어디서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는가?" 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유명한 고전기 그리스의 청동조각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 (기원전 5세기)도 예외가 아니다.

건장한 신체에 위엄이 가득찬 얼굴,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삼지창을 들어 던지려는 그 위압적인 자세. 이 모든 것이 마치 진짜 포세이돈 신이 지금 우리 눈 앞에 다가선 듯 박진감 넘치게 표현돼 있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에서 보는 것처럼 항해자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무서운 신이었다.

'인생은 항해' 라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 신과 맞닥뜨려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누가 과연 이 신과 대적해 오금이나마 제대로 펼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유한한 인간이 이처럼 거대한 장애와 맞서 싸우는 게 인생이다.

그렇게 도전하는 자가 자유인이요, 비겁하게 굴종하면 노예가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자기보다 큰 상대를 놓고 싸우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진정한 자유인이 될 뿐 아니라 보다 원대한 이상과 목표를 지니게 된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인생의 투쟁을 통해 이렇듯 무한히 크는 것이다. 그 투쟁의 '성장통(成長痛)' 으로부터 깊은 감동과 카타르시스의 샘물을 길어올리는 것이 예술이다.

그리스의 예술, 나아가 서양의 예술은 이처럼 인간의 이상과 감성을 진하게 담은 인본주의적 예술로 자라났다.

기원전 1백년께의 대리석 조각 '아프로디테와 판' 은 그 휴머니즘이 아주 곰살맞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전개된 사례다.

염소 다리를 한 목신(牧神) 판이 아프로디테를 희롱하고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샌들을 벗어 그를 때리려 한다.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 처럼 과거 신들에게 봉헌하기 위해 제작된 근엄하고 거룩한 조각상들과는 또 다른,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자유와 휴머니즘, 이성의 이름으로 역사와 예술을 신들의 소유가 아닌 인간의 소유로 넘긴 최초의 인간이 됐다.

그리스 미술은 그 영원한 증거물이다.

1891년 개관한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에는 이밖에 '안티키테라의 젊은이' (기원전 340년께), '마라톤 소년' (기원전 340년께), '말과 소년 기수' (헬레니즘기) 등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적인 인체상이 많이 있다.

'아가멤논의 가면' (기원전 1500년 경) 등 훌륭한 공예품도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관람메모>

*주소 : 44 Patission, Exarcheia

*전화 : 01-821-7717

*교통 : 지하철 오모니아역 하차

*휴관 : 1월1일, 3월 25일, 부활절, 5월 1일, 12월 25, 26일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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