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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서동만과 김일영을 기억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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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돌아보면 올해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그러했고,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서거가 그러했다. 세 사람의 죽음은 새삼 화해와 통합, 그리고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 기억하고 싶은 또 다른 슬픔은 지난 6월 서동만 교수와 11월 김일영 교수의 죽음이다.

개인적으로 두 교수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서동만 교수와는 몇 년 전부터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 27’이라는 포럼에서 함께 활동했다. 서 교수는 대북 포용정책의 대표적 전문가였다.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학구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2004년 학계로 돌아온 서 교수는 미국과 일본의 대북정책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한편 노무현 정부가 초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 안타까워했듯 그의 죽음은 학문적으로나 정책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일영 교수와의 인연은 좀 더 올라간다. 1980년대 중반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우리는 산업사회연구회에서 국가론 세미나를 함께했다. 교수가 된 후 언제부턴가는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를 대변해 김 교수와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이선민 문화부장이 토로했듯 그는 한국 현대사를 가장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한 뛰어난 정치학자였다. 김 교수의 부음을 들었을 때 먼저 떠올랐던 것은 지난 10월 말 그와 나눈 마지막 통화였다. 부디 기운을 내라고 말했지만, 다소 숨찬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마음 한편에 서늘하게 남아 있다.

예기찮고 더없이 안타까웠던 두 교수의 죽음으로부터 생각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문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게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의 갈 길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다. 일의 성패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옳고 그름의 신념윤리가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책임윤리에 선행해야 한다는 게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갖는 일차적 사명이라고 막스 베버 역시 강조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서 교수와 김 교수는 모두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경계에 서서 그 긴장을 견뎌 온 지식인들이다. 남북한 평화정착, 부국으로서의 성장,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숙은 이념을 떠나 여전히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다. 평화든 부국이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학문 연구와 정책 개발은 동시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은 신념윤리의 관점에서 평화와 부국을 탐구하고,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그 비전과 대안을 모색해 온 지식인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우리 사회의 미래다. 2010년은 우리 역사에서 뜻 깊은 해다.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4월 혁명 50주년,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두 교수와 연관해 나는 70년과 2000년을 주목하고 싶다. 70년은 박정희 체제가 추구했던 부국의 명암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던 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해인 동시에 전태일이 분신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0년은 역사적인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해다. 10년의 우여곡절 끝에 최근 남북관계는 교착 상태에 놓여 있다.

정치적으로 서 교수와 김 교수가 결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화와 부국은 상충적 가치가 아니라 상보적 목표다. 나라를 사랑하고 그 미래를 모색하는 데 이념적 차이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이념은 둘일지언정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은 하나였을 것이다. 평화와 부국을 위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평화와 부국이 두 교수가 동료와 후배들에게 남겨 놓은 숙제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시 서동만 교수와 김일영 교수의 책 여기저기를 들춰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처럼, 두 사람 역시 새벽에 일어나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우리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에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꿈꿨던 남북한 평화정착과 새로운 부국에의 길, 성큼 다가선 2010년에는 부디 성취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두 교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기원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