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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행 매각, 정책 선택의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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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으로 기소된 변양호(55)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29일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청탁을 받고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으로 기소된(2006년) 변 전 국장에게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무원이 임무를 어기고 제3자에게 이익을 취하게 해 국가에 손해를 입혔다면 배임죄가 성립할 수 있다”면서도 “금융기관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직무에 적합하다는 신념에 따라 내부 결재를 거쳐 시행한 것이라면 정책 선택과 판단의 문제일 뿐 배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이 국내 공직 사회와 금융권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변 전 국장의 구속 이후 공무원들 사이엔 ‘책임질 일은 피하고 보는 게 좋다’는 의식이 퍼졌다.

[뉴스분석] 먹튀 논란 부추긴 ‘국민정서법’에 제동
변양호씨 항소심도 무죄

항소심에서도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대법원 상고심에선 사실 다툼이 아닌 법리 적용이 제대로 됐는지만 판단한다. 따라서 이번 판결로 공직자의 정책 판단을 사법적인 잣대로 재단하려는 데 제동이 걸린 것이다. 변 전 국장의 변호인인 노영보 변호사는 “사필귀정”이라고 표현했다.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공직사회와 금융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정책적인 판단을 했다 나중에 잘못 걸리면 큰 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본 공무원들은 미묘한 판단이 필요한 일에는 적극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이다. 익명을 원한 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환은행 매각 때문에 변 전 국장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지켜봤다”며 “추후 논란이 야기될 수 있는 일에 나서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계에선 이번 판결을 ‘국민정서법’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이런 정서를 배경으로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이 외환은행 매각을 문제 삼았고, 감사원과 검찰이 의혹 캐기에 나섰다. 특히 2004년 10월 현 지식경제부 장관인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된 의혹설을 제기했고, 이에 근거해 한나라당은 ‘론스타 게이트 진상조사단’까지 만들었다. 중앙대 홍기택(경제학) 교수는 “매각 가격은 재무제표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도 감사원과 검찰 등이 너무 무리하게 헐값 매각이라고 판단했다”며 “이 문제로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가 큰 타격을 받았고 금융산업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외국 투자자에 대한 ‘먹튀’ 논란이 정상적인 투자나 거래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도 해외에서 투자를 많이 하는 판국에 국내에서 ‘먹튀’를 비난할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국민은행이 2003년 835억원에 사들인 인도네시아 BII 은행의 지분을 지난해 3750억원에 매각해 2915억원을 챙겼지만 현지에서 ‘먹튀’ 논란은 없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외환은행 매각은 탄력을 받게 됐다.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한 ‘사법적 걸림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은 지난 10월 외환은행 지분(51.02%)을 6개월에서 1년 내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곳은 KB금융지주·하나금융지주·산은금융지주·농협 등이다.

김원배·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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