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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5. 흥보가 첫 완창

1968년 9월 30일. 이 날은 나에게 있어서나 우리 판소리계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5시간 25분에 걸쳐 최초로 '흥보가' 완창을 해낸 날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완창' 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또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완창 판소리 공연을 하겠다고 하자 그동안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국악인들은 '옳다구나' 하고 헐뜯기 시작했다.

"5시간이 넘게 한 자리에서 소리를 한다고? 지가 뭔데. " "다른 사람도 아닌 박동진이가 어떻게 소리를 그렇게 오래 해?" 남들은 다 나를 따돌렸지만 유일하게 내 뜻을 이해하고 격려해 준 이가 바로 고수 한일섭씨와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인 성경린씨였다.

한일섭씨는 함께 공연준비를 하며 '힘들다' 소리 한 마디 없이 묵묵히 나를 도와주었다.

일단 공연을 하기로 결심을 하니 홍보가 필요했기에 서울신문사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정부 유관지인 만큼 우리 것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화부장을 비롯한 신문사 사람들은 "어려운 결심하셨다. 얼마든지 도와드리겠다" 며 선뜻 후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공연을 준비하는 가운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VUNC)에서 내 공연을 녹음해 3백분 동안 특집 라디오 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방송을 해온 지 여러 해 됐지만 한 번에 한 목소리로 5시간 동안 방송한 적은 없다. 정말 대단하다" 고들 했다.

다들 공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또 그때만 해도 쇼 공연을 많이 할 때라 대관도 해 주지 않아 결국 협소한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서울신문을 비롯한 몇몇 신문에 공연 사실이 기사화된 덕에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었다. 공연 시간 내내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먹은 것이라곤 물 몇 모금 마신 것이 전부였다.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공연을 했다. 물론 휴식시간도 없었다.

긴 시간이 걸리는 공연인 만큼 도중에 나가는 관객도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공연을 관람했다.

워낙 오랜 시간 관람하다 보니 관객들은 매점에서 빵도 사다 먹고, 몇몇 흥이 난 사람들은 소주잔도 부딪쳐 가며 내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5시간 25분간의 공연이 끝나는 순간, 관객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 내게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내년에는 8시간 분량의 '춘향가' 완창 공연을 하겠습니다. " 또 한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나중에 아내로부터 들으니 성경린 원장은 '과연 무사히 공연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에 공연장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5시간 내내 밖에서 서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고 했다. 무대를 떠나 분장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데 보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걸 본 주위 사람들은 다시 놀라며 "무서운 사람" 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완창 판소리 공연은 소리꾼으로서의 내 인생을 바꿔놓은 큰 사건이었다.

그동안 경원시한 국악협회 사람들이 찾아와 국악인들의 친목계인 청우회에 들어오라고 하질 않나, 그 때부터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스타' 가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갈 길이 먼 나는 묵묵히 다음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춘향가' . '심청가' . '적벽가' . '수궁가' 등 판소리 5마당의 완창과 창작 판소리 등 내가 해야할 일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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