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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갈 데까지 가자는 건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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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말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건가. 급속히 확산되는 각계의 '내 몫 챙기기' 움직임, 그리고 갈수록 거세지는 그들의 집단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의사들이 병원 문을 닫더니 이번에는 은행 업무가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철도건설공단.한국전력 등 일부 공공부문이 술렁거리고 한국.민주노총도 총파업 동참 의사를 보이고 있다. 마치 온 나라가 노정.노사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 같은 분위기다.

일부에서 보이는 과격 행동은 더욱 충격적이다. 특히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노조원들이 이사장 등을 감금하고 폭행한 것은, 원인이야 어쨌든 너무 심했다.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법이 먹혀들지 않는, 아노미(무질서)상태로 치닫는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들게 한다. 왜들 이러나. 국민은 불안하다.

물론 근본 책임은 무원칙과 잦은 말바꾸기로 신뢰를 잃은 정부측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성.정통성 없는 낙하산 인사도 공공부문 집단행동의 한 요인이 되고 있으며, 공기업.금융.기업에만 고통을 강요하는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심각한 고민 없이 공권력에만 의존하는 정부의 무대책성도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 해도 최근 우후죽순처럼 터져나오는 이익집단들의 욕구 분출은 강도와 방법에서 도가 지나치다. 불법 파업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의사협회 회장을 구속하자 바로 재폐업 찬반 투표로 맞서는 의사들의 행동은 사회지도층 인사로서의 의식을 의심케 한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극한 투쟁을 벌였다면 최소한의 양보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수십조원의 혈세가 들어간 은행의 구조조정조차 못 받아들이겠다는 일부 은행원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나름대로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이 집단이기주의로 비춰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우리 경제에 대한 경고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은 우리의 구조조정 성과에 의문을 표시하며 '방치할 경우 대외신인도에 걸림돌이 될 것' 이라고 지적한다. 자금경색 속에서 산업현장의 활기도 주춤해지는 모습이다.

동남아발 금융 불안 등 대외 여건도 심상치 않다. 지금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면 경제가 활력을 잃고 한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다시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결과는 기업의 연쇄부도와 대량 실직, 그리고 서민들의 고통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교훈을 벌써 잊었는가.

정당한 요구는 당연한 권리며, 정부.사용자들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각 이익집단의 단체행동과 의사표시 역시 법과 제도의 절제된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성을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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