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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선사 이제 빛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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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8세기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선불교의 큰 인물이었던 무상선사.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인 무상(無相.684~762) 선사가 1200년의 망각을 딛고 한.중 불교교류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3년 전 그가 중국 불교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오백나한(五百羅漢)에 등장하는 455번째 인물임이 확인된 데 이어 지난 18일 그의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중국 청두(成都)성 대자사(大慈寺) 경내에서 열렸다. 대자사는 무상이 당나라 현종의 칙명으로 주지를 지냈던 절이고, 그가 열반한 공간이다.

이번 한.중학술회의는 한국의 월간 '선문화'와 명원문화재단 측과 중국 대자사가 공동주최한 것. 회의 자체가 중국 측이 예전 찻집(茶館)으로 운영되던 대자사를 사찰로 복원한 뒤 열려 중국의 전통문화 복원영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향후 양국 사이에는 무상연구회를 결성하며, 학술회의를 번갈아 개최하기로 합의, 무상은 장차 한.중 불교교류의 상징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문제는 한국 불교계가 무상에 대한 정보나 관심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무상이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한국 불교 법맥 흐름의 열쇠를 쥐고 있음이 속속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 초기 선불교의 '블랙박스'임을 감안하면 이런 한가한 국내 사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실 무상이 중국 오백나한 반열에 올랐다는 규명도 한 개인연구자의 공로. '선 문화' 발행인 최석환씨가 2001년 중국 쓰촨의 현지 답사와 베이징(北京)도서관에서 확인한 개가였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하면 중국의 오백나한은 석가모니가 첫 번째이고, 일반에게 유명한 달마대사는 307번째로 모셔진 반면 6조 혜능은 아예 포함돼 있지도 않다.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이나 원측 같은 신라 승려들 역시 포함되지 않아 무상의 법력과 영향력을 가늠케 해준다. 속성을 따라 김화상(金和尙)으로도 불리는 무상은 728년 중국에 건너온 이래 쓰촨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초기 선종의 대표적 계파인 정중종(淨衆宗)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당나라 선불교와 한국 불교의 법맥에 주는 영향이 주목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놀랍게도 중국 선종사를 장식하는 걸출한 인물인 마조(馬祖.709~788)가 무상의 제자다. 마조는 중국 선종사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했던 핵심인물에 해당한다. 호방하면서도 평상심을 강조했던 그의 선풍(禪風)은 그 밑의 제자인 백장(白丈.749~814)에게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백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말라" 등 청규(淸規)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10년 전 연세대 민연규 명예교수는 무상이 뿌린 이런 선풍이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7개파에 뿌리로 연결된다는 점, 이후 그의 사상은 '삼국유사'를 쓴 고려의 일연 스님, 조선조의 김시습으로 이어져 왔다는 선구적인 주장을 내놓은 바도 있어 무상에 대한 규명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특히 무상이 차문화를 가꾼 핵심인물이기도 해 그의 선 사상과 다예를 결합할 경우 실생활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되고 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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