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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두번 의사당 찾은 오바마, 의원들에 “타협해 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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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08면

오바마 대통령이 24일 백악관에서 건강보험 개혁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 블룸버그=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의 9부 능선을 넘어섰다. 지난해 8월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난소암으로 숨진 자신의 어머니(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1995년 사망)를 떠올리게 하며 건보 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한 지 1년4개월 만이다. 그는 스스로를 “어머니가 암으로 병상에서 죽어가면서도 건보 회사와 논쟁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에선 현재 4800만 명이 건보에 가입하지 못하고 서민들은 보험 혜택 범위가 좁다.

美 100년 숙원 ‘건보 개혁법안’ 통과시킨 ‘설득 리더십’

오바마는 건보 개혁을 위해 선봉장을 자처했다. 언론 인터뷰, 타운홀 미팅, 의회 설득은 물론 보험회사 CEO와의 회동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반대파를 설득해 나갔다. 의회에선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과 해리 리드 상원 원내총무가 치밀한 전략·전술로 뒷받침했다.

오바마의 뚝심과 리더십은 24일 오전 7시(현지시간) 상원에서 결실을 봤다. 공화당 의원(39명)이 모두 반대한 가운데 민주당 58명, 무소속 2명의 지지를 얻어 건보 개혁 법안이 통과됐다. 공화당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저지하는 3분의 2를 확보한 덕택이다. 오바마는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음 개혁을 주창한 이후 7명의 대통령이 건보 개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며 “역사적인 표결”이라고 평가했다.

법안 통과 위해 ‘누더기 법안’ 감수
건보 개혁법안은 오바마가 발휘해온 설득과 타협의 리더십의 결실이다. 대선 공약으로 정부운영 건보안을 내걸었지만 의회 설득을 위해 이를 포기했다. 지지 기반인 진보 진영의 반발을 무릅쓴 것이었다.

상원의 법안 통과는 거듭된 설득-양보-타협의 과정이었다. 상원은 지난달 21일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했다. 법안은 건보 미가입자 중 3100만 명에게 보험 혜택을 주기 위해 10년간 8450억 달러(약 1000조원)의 재정을 푼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또 공영 건강보험을 도입하고, 낙태 시술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방안은 상원에서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공화당은 물론 중도 성향의 민주당 의원까지 반발했다.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었다. 상원 통과를 위한 60석 확보가 힘들어졌다.

이 상황에서 오바마가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요일인 6일 워싱턴DC 의사당을 방문해 당내의 중도·진보 성향 의원 10명과 만나 타협을 주문했다. 대통령이 휴일에 의사당을 찾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상원의 민주당 지도부는 반발하는 의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중도파 반발이 심한 공영보험 도입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정부가 보장하는 고령자 건강보험(메디케어) 적용 연령을 65세에서 55세로 낮췄다.

그러나 타협안도 상원 통과가 불투명했다. 무소속인 조셉 리버먼 의원이 메디케어 혜택 확대에 반발했다. 벤 넬슨 의원(민주)은 정부 지원 건강보험의 낙태 시술 지원에 반대했다. 이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법안 통과는 힘들었다. 민주당은 재타협안을 만들었다. 진보 진영은 반발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바마는 넬슨을 세 차례나 개인적으로 만나 협조를 당부했다.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인 해리 리드 의원도 날마다 넬슨과 만났다. 험난한 협상 끝에 건보 법안은 가까스로 마지노선인 60명을 확보했다.

오바마는 15일 민주당·무소속 의원들을 백악관에 불러 단결을 호소하는 한편 개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강조했다.

클린턴 땐 백악관서 주도하다 실패
오바마는 취임 이후 건보 개혁을 최대 국정과제로 삼아 자신과 민주당의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했다. 이제 남은 고비는 상·하원 조정위원회에서 단일법안을 만들어 상·하원에서 각각 통과시키는 절차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 등이 기득권 세력인 의료계와 보험업계 등의 반발로 주저앉았던 것과 비교하면 대성공이다. 클린턴은 백악관 주도로 건보 개혁을 밀어붙이다 밀실행정 논란과 공화당의 반발에 막혔다.

오바마는 클린턴 행정부의 실패를 거울 삼아 백악관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민주당 의원들이 주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러면서 개혁의 동력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불을 지폈다. 의원들을 직접 만나 법안 통과를 독려하고 대국민 연설을 통해 공감대를 확산시켰다. 막다른 골목에 막힐 때면 의사당을 찾아가거나 의원들을 백악관에 불러 타협과 양보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내가 건보 개혁 법안에 서명하는 순간을, 여러분은 정치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독려했다.

미 건보업계는 상·하원 의원 1인당 등록된 로비스트만 6명을 둘 정도로 법안을 저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올해도 로비 자금으로 수억 달러를 썼다. 대형 업체인 애트나는 무소속인 리버먼 의원에게 11만 달러 이상의 정치자금을 줬다.

상·하원 법안은 모두 정부 돈을 들여 3000만 명 이상의 무보험자에게 건보 혜택을 확대하는 걸 골자로 한다. 재원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고 메디케어의 비용을 줄여 마련한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과반수 표결 원칙이기 때문에 상원안과 비슷한 상·하원 단일안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단일안의 상원 통과를 위해서는 여전히 60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건보 개혁은 국가와 시장, 진보와 보수, 효율과 평등 같은 이념 논쟁으로 치달았다. 오바마와 민주당은 여기에 미국의 경쟁력 강화라는 문제의식을 더한다. 미국의 1인당 연간 의료비는 7349달러(약 950만원·2007년 기준)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를 제외하고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다. 국내총생산(GDP) 비중도 15.3%로 한국(6.8%)의 두 배를 웃돈다. 이런 추세라면 2018년 GDP의 20%를 의료비로 지출해야 할 처지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 자동차업계의 경우 한국·일본 업체와 비교해 차 1대에 18만원의 비용을 더 부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이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선진국 대부분이 채택한 공영보험 도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부가 보험을 운영하면 유리한 입장에서 의료계와 제약업계와 협상할 수 있어 의료비를 낮추기 쉽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는 최근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건보 개혁 법안이 누더기가 되고 한계도 많지만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며 “미비한 점은 앞으로 수년간 시행착오를 거쳐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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