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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를 유혹한 에덴의 뱀처럼 긴 러프는 날 시험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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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16면

캐슬 코스에서는 세이트루이스 대성당과 무너진 성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앞의 동그란 건물은 클럽하우스로 코스의 둔덕들과 잘 어울린다.

밤새 호텔 창문이 덜컹거렸다. 창문 틈을 넘어 들어오는 바람소리엔 귀신이라도 실려올 것 같았다.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는 음산한 분위기였다.

성호준 기자의 스코틀랜드&웨일스 투어 에세이 ⑫ 세인트 앤드루스 캐슬 코스

아침에 바람은 잠잠해졌다. 2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알게 된 조지 페퍼를 만났다. 그는 내가 존경하는 골프의 현인이다. 미국의 골프 매거진 편집장을 지낸 조지는 은퇴 후 이곳에서 책을 쓰며 산다.

슬라이스 때문이다. 그는 1983년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라운드 중 OB가 난 공을 찾으러 코스 담 너머로 나갔다가 급매물로 나온 집을 샀다. 18번 홀 페어웨이 옆에 있는 그의 집값은 이후 엄청나게 올랐다. 그는 “그 푸시 슬라이스가 인생 최고의 샷이었다”고 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나의 슬라이스는 나에게 행운을 안겨준 적이 없다.

그의 집 정원으로 다른 골퍼들이 슬라이스를 낸 공들이 들어온다. 그는 “이곳에 온 이후로 공을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골퍼의 가장 큰 영예 중 하나인 R&A(로열&에인션트 클럽) 회원도 됐다. 결과적으로 슬라이스 때문이다. 슬라이스는 그에게 축복이다.

발베니 캐슬 앞에 선 성호준 기자. 장미꽃을 바쳐 살아남은 미인의 전설이 남아 있다.

마침 올드 코스에서 R&A 회원들을 위한 골프대회가 열리던 중이어서 그는 나와 함께할 수 없었다. 내가 라운드할 세인트 앤드루스 캐슬 코스에 대해 물었다. 조지는 잠깐 망설이더니 “경치가 좋은 코스”라고 말했다. 표정으로 봐선 별로 좋지 않은 코스라는 얘기 같았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그는 “그린이 어려워 퍼팅을 많이 할 거고, 마녀나 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냥 농담”이라고 웃었다.

캐슬 코스는 분위기가 그윽했다. 링크스의 특징인 둔덕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둔덕 때문에 진입로는 옛날 시골길처럼 구불구불했다. 흐린 날이어서 공동묘지 같은 분위기도 났다. 올드 코스보다 훨씬 오래된 것 같은 태고의 신비가 느껴졌다. 코스는 풍광이 좋은 절벽 위에 자리했다. 세인트 앤드루스 대성당과 무너진 성의 실루엣도 보였다. 경치는 올드 코스보다 훨씬 나았다. 클럽하우스 는 현대적이었지만 둔덕들과 하모니를 이뤘다. 코스를 위압하지도, 제압되지도 않았다. 올드 코스에서 라운드하고 있을 조지가 부럽지 않았다.

코스는 데이비드 맥레이 키드가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의 오리지널보다 더 진짜 같은 링크스를 설계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미국에서 유명해진 그가 다시 고향에 와서 멋진 코스를 재현해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둔덕은 마치 성벽처럼 홀과 홀을 갈라놨다. 둔덕은 페어웨이 안에도 드문드문 솟아 있다.

티에서 보는 둔덕들도 멋지지만 페어웨이에서 보는 그린은 훨씬 환상적이었다. 키드는 그린이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설계했다. 실제로 가보면 뒤에 여유 공간이 있지만 그냥 보면 그린을 넘어가는 샷은 바다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짧은 게 낫다는 생각으로 부드럽게 샷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결과가 좋았다. 골퍼를 배려하는 키드의 천재성이 느껴진다. 슬라이스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티샷의 낙구 지점 오른쪽 페어웨이가 불룩하니 넓다. 슬라이스가 나서 실망해서 가보면 공은 제법 괜찮은 라이에 있을 때가 있다. 골퍼의 90%를 차지하는 슬라이스 구질의 오른손잡이들이 즐거워할 코스다.

나의 동반자는 프랑스에서 온 론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성격도 밝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영어를 나처럼 더듬더듬 해서 좋았다. 그는 280야드 정도를 치는 장타자였다. 그가 미사일 같은 샷을 치면 나는 힘이 들어가 슬라이스를 냈다. 그런데 론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받고 나선 반드시 엄청난 슬라이스를 냈다. 론이 슬라이스를 내면 나는 공을 똑바로 쳤다. 론의 여자친구는 세 홀에 한 번 정도 전화를 했다. 그의 여자친구도 좋은 사람 같았다.

코스는 한적했다. 만약 붐볐다고 해도 둔덕이 워낙 많아 인적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둔덕 때문에 나와 론은 페어웨이에서는 얼굴도 못 보고 그린에서 다시 만난 홀도 몇 번 있었다. 이렇게 혼자 있을 때는 잡생각이 난다.

9번 홀에서다. 공이 긴 러프에 들어갔다. 러프에서 치면 스핀이 걸리지 않아 그린을 지나 바다에 빠질 것 같았다. 공을 옮기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있는 그대로 친다(play as it lies)’와 ‘정직’이 골프의 두 축이다.

둔덕 너머로 나가 그린의 굴곡을 보고 돌아왔다. 포대 그린이라 뒤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돌아와 보니 러프가 더 길어졌다. 짧은 시간 풀이 자랄 리가 없다. 불안한 나의 마음 속에서 러프가 자란 것이다. 다시 공을 옮겨놓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라운드 후 조지를 만났다.
매치에서 승리해 기분이 좋아 보인 그가 물었다
“뱀을 만났느냐?”

난 뱀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당신이 말하는 뱀이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한 뱀인가요?”
조지는 빙긋 웃으면서 “뱀의 유혹을 이겼느냐?”고 물었다.
나는 9번 홀에서 공을 옮기지 않았다. 론이 다가오는 것 같아 그만뒀다. 그러나 죄짓다 걸린 것 같아 도망가듯 급하게 쳤고 더블파를 했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이후에도 공을 옮기지 않았다.
“유혹에 넘어갈 뻔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겨냈어요.”
“그린에서도 이겼나.”
덜컥했다.

캐슬 코스는 그린이 아주 어렵다. 난 3퍼트를 안 하려고 공을 닦는 과정에서 몇 차례 1~2cm씩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 부정행위를 이곳에선 자벌레(inchworm)라고 한다.
말을 못 하자 조지가 다시 한번 웃더니 “캐슬 코스는 골퍼를 너무 많은 유혹에 빠뜨린다”고 말했다. 얼굴이 화끈했다. 그가 알려준 것이 또 있다. 캐슬 코스의 둔덕들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포클레인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화장도 하지 않은 미인인 줄 알았는데 100% 성형미인이었다. 그 미인의 유혹에 나는 벌레가 됐다.

캐슬 코스에서 라운드한 기념으로 발베니 캐슬에서 만드는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를 마셨다. 15세기 발베니 성에서 일어난 사랑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성에 살던 귀족이 왕에게 도전했다가 실패해 일가 친척이 몰살을 당했다. 그러나 왕은 반역자의 딸 마거릿만은 살려줬다. 절세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마거릿을 발베니 성에 살게도 했다. 임대료조로 매년 장미 한 송이를 받았다. 가족을 죽인 왕에게 장미꽃을 바치며 살아남은 미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장미향을 간직한 술 한 방울은 마거릿의 눈물 한 방울이었다. 발베니 캐슬은 세인트 앤드루스 캐슬 코스보다 순수했다.

술이 거나해져 론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네 슬라이스에 기뻐했으며, 공을 움직이려 했고, 몇 차례 마커를 밀어 넣었다.” 론은 먹던 안주를 내 얼굴에 튀기며 크게 웃었다. “난 너 안 볼 때 공 몇 번이나 옮겼는데….”



취재협조 영국 관광청, 스코틀랜드 관광청,
웨일스 관광청 www.visitbri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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