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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라운지] "대사관, 24시간 도청당하는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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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지난 11일 북한을 방문한 빌 라멜 영국 외무차관이 평양의 한 백화점을 둘러보고 있다. 북한은 양강도 폭발 후 라멜 차관에게 "양강도 폭발은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산을 폭파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평양 AP=연합]

북한 주재 외교관들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지난주 북한 양강도 '폭발 징후'를 둘러싼 논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핵실험이다" "무기고나 열차 폭발사고다" "단순한 구름일 뿐이다"라는 등 폭발의 실체를 놓고 한바탕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난 16일 영국 등 서방국가의 평양 주재 외교관들이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사태가 단번에 정리됐다.

◆ 중국.러시아는 특급대우=사실 그동안 북한 주재 외교관들은 국내외적으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동구권 국가의 한 서울 주재 외교관은 "평양에 근무할 당시 고급정보에 대한 접근이 원천봉쇄돼 있어 현장에 나가 있다는 이점을 도무지 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과 수교한 국가는 총 155개국. 하지만 평양에 상주 대사관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21개국에 불과하다. 총영사관을 개설한 국가도 두곳뿐이다. 나머지 130여개국은 중국.한국 등 인근 국가의 대사가 주 북한 대사를 함께 맡도록 하고 있다. 뉴질랜드.네덜란드 등 8개국은 주한 대사관이 주 북한 대사관을 겸하고 있다.

평양 주재 대사관은 대부분 대동강변에 조성된 외교단지에 위치해 있다. 이 중 중국.러시아.베트남 등 전통 우방은 특별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경우 노동당 3호청사 부근 노동신문사 건너편에 따로 대사관을 마련해 놓고 있다. 북한은 최근엔 영국 등 유럽연합(EU) 국가에도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 활동에 어려움 많아=북한에 근무했던 외교관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애로점은 다름 아닌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방국가의 한 외교관은 "평양에 있는 대사관은 24시간 도청당한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라며 "운전사부터 요리사까지 모두 북한 정부가 심어놓은 사람들이어서 활동에 제약이 많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최우방이라는 중국조차 대사관과 본국을 잇는 비밀 핫라인을 가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터넷 연결망도 본국에서 직접 끌어다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신홍 기자<jbjean@joongang.co.kr>

*** 토르자 서울 주재 헝가리 대사

"내가 있던 80년대라면 양강도 폭발 몰랐을 것"

"제가 평양에 근무하던 1980년대였다면 아마 양강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겁니다."

이슈트반 토르자(사진) 주한 헝가리 대사는 서방 8개국 외교관들이 북한 양강도 폭발 현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몹시 놀랐다"고 말했다. "빌 라멜 영국 외무차관이 마침 방북 중이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확실히 시대가 바뀌었다는 실감이 들더군요. 북한도 국제사회의 요구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을 겁니다."

토르자 대사는 남북한을 고루 경험한 외교관이다. 82년부터 약 5년간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에 근무했다. 한국에서도 88~93년 대사로 활동했고 지난해 다시 부임했다. 그는 북한을 이데올로기 색깔이 너무 강렬해 "외교관으로서 일하기 가장 어려웠던 나라 중 하나"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외교관도 허가없이 평양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당국에 1주일 전에 알려야 했지요."

당시 헝가리 대사관에는 현지인 직원이 17명 있었는데 이들의 고용과 임금지급은 당국을 통해서만 이뤄졌다고 한다. 북한 외무성으로부터 헝가리에서 만든 세계지도에 한반도가 남북 구분없이 한 색깔로 표시됐으니 수정하라는 지적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반도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토르자 대사는 "남과 북은 일본의 압제를 이겨냈다는 자긍심을 공유하고 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방법을 찾기 바란다"고 충고했다.

기선민 기자<murphy@joongang.co.kr>

*** 북한, 서방에 손짓

영국.EU 등과 잇단 관계개선 행보

평양 중구역 중구동에 위치한 북한 외무성 청사가 부쩍 분주해졌다. 중국.러시아 등 기존 우방과의 외교업무 외에 국제사회와의 관계 개선, 경제 지원 요청을 위한 업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제개혁과 관련한 국제 워크숍도 외무성이 챙기고 있다. 특히 북한은 최근 영국.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에 정성을 쏟는 모습이다. 북한은 이달 초 북한 인권문제 논의차 평양을 방문했던 빌 라멜 영국 외무차관에게 북한에 노동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일종의 고백외교다. 또 양강도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을 보여달라는 라멜 차관의 요청도 받아들였다. 라멜 차관의 귀국 가방에 선물을 안긴 것이다. 대신 북한인 1000명의 영국 기술연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 세계에 대한 북한의 손짓은 경제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북한은 지난달 31일부터 닷새간 북.EU 경제개혁 관련 국제 워크숍을 열었다. 이번 워크숍은 북한이 2002년 7월 실시한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보완을 염두에 두고 경제 배우기를 하려는 것이다. 북한 외무성이 주최하고 평양 주재 EU 회원국 대사관의 협조로 열렸다. 워크숍에 참석했던 기 르두(49) 주한 EU대표부 부대표는 "이번 워크숍에 북한 외무성과 재정성.노동성 등 경제관련 부처 관계자가 대거 참석한 것은 북한이 경제개혁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용수 기자<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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