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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50년 이젠 평화다] 下. 뒤엉키는 반공교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남북한 정상이 '6.15공동선언' 에 서명한지 며칠 후인 지난 19일 오후 서울 D중학교 안보 교육시간.

인근 경찰서의 협조로 강사로 나온 북한군 출신 귀순자는 "지난번 김정일'(金正日)' 이 한 말은 술수이고 다 거짓말" 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스피커를 통해 이 얘기를 듣고 있던 학생.교사들은 "무슨 소리냐" 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강연은 "김정일 같은 죄인이 어떻게 남한의 성공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느냐. 평양공항에 나올 때 기어 나와야 마땅하다" "김정일이 웃는척 하지만 적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는 내용으로 강의는 10여분간 계속됐다.

이 학교 도덕담당 朴모(48)교사는 "요즘 학생들은 과거 전쟁이나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어 통일.안보를 가르치기가 힘든데 냉전논리에 바탕을 둔 주입식 교육은 여전한 것 같다" 고 말했다.

서울 Y초등학교 6학년 S교사(47)는 최근 도덕 수업시간에 "6.25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는 말을 했다가 "무슨 전쟁이 난다고 그러세요" 라는 학생들의 핀잔을 듣고 적잖이 당황해했다.

이처럼 학교 현장에서는 지난 50여년간 북한을 적대시한 반공교육이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온 50여시간의 남북정상 만남을 계기로 형체를 잃어버릴 정도로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앞으로 교육현장에서 '6.25전쟁' 과 북한을 어떻게 가르칠지에 대한 준비가 뒤따르지 못해 학생들과 교사들이 갑작스런 인식변화에 혼란을 겪고 있다.

◇ 세대간 인식 혼선〓 '6.25전쟁과 분단' 을 가르치는 학교 현장의 교육은 ▶멸공.승공(1955~72년) ▶반공(1973~86년) ▶통일.안보(1987~91년) ▶민족화해.협력, 동질성 회복(1992~2000년)으로 강조점이 변천해 왔다.

이 과정에서 '멸공.승공.반공' 에 익숙한 기성세대가 '화해.협력' 이 강조되는 시대의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세대간 인식차가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통일.안보' 를 강조했던 90년 초반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 역시 "북한 공산군이 3년여 동안 우리 강토를 피로 물들인 전쟁을 시작했다.

북한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 하고 있어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며 5개 단원 중 1개 단원을 전쟁의 원인론 규명에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부터 전쟁의 원인과 배경, 이후 남북한간의 갈등을 서술하는 교과서 내용은 초.중학교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고 고교 1학년부터 다뤄진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차우규(車宇奎)박사는 "과거엔 초.중학교 때부터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을 적대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교육이 이뤄졌으나 현재는 그 비중이 크게 줄고 있다" 며 "갑작스런 남북관계의 변화가 기성세대, 특히 교사들에게 인식의 혼선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고 설명했다.

연세대 교육학과 한준상(韓駿相)교수는 "북한을 잘 알지 못하는 '북맹(北盲)' 교사들이 평화교육을 가로 막고 있다" 고 지적했다.

◇ 평화교육으로의 전환〓지난해 말 한국교육개발원이 중학생 9백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중학생의 46%는 '통일이 필요하다' 고 보고 있었으나 나머지는 '필요없다' '현상태 유지' '관심없다' 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서울대 사회학과 박명규(朴明圭)교수는 "지금까지 통일교육이 남과 북의 체제비교 위주로 진행돼 왔으며,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그나마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왔기 때문에 학생들이 흥미를 갖기 힘든 탓" 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분단의 비극' 을 강조하는 기존의 전쟁교육에서 '더불어 사는 평화교육' 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과 통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위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교육개발원 한만길 교수는 "통일의 당위론이나 체제.이념 우위를 주입식으로 강조하는 교육보다 직접 체험하고 활동하는 교육을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이 처한 현실을 느끼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줘야 한다" 고 지적했다.

북한 만화영화 감상, 인터넷을 이용한 '북한 알기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는 서서울정보산업고교의 조휘제(趙輝濟.52)교사는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통일교육 자료를 개방하고 교사들의 자율성을 더 확대해 줘야 한다" 고 지적했다.

강홍준.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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