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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먼 평화 가까운 평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레바논 남부와 맞닿은 이스라엘 북단의 국경마을 메툴라에서는 벌써 전쟁의 흔적이 사라졌다.

거기까지 진출한 맥도널드에서 장교 한두사람을 만난 정도다.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지난달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한 결과다. 평화는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동이 걸리면 진행은 빠른 것 같다.

메툴라의 동남쪽은 중동평화의 또하나의 함정인 골란고원이다. 이스라엘군과 시리아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골란고원을 찾는 사람에게는 실망이 기다린다.

병영(兵營)도 없고 군인도 없다. 바람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풍차들만 한가롭게 돌고, 이스라엘과 시리아 국경지대에 걸쳐 사는 아랍계 드루즈족들의 마을이 해발 2천2백m의 헤르몬산 기슭에 점점이 엎드려 있다.

쿠니트라 계곡의 국경선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평화유지군의 서너동의 숙사가 그곳이 국경지대임을 말해 줄 뿐이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최종단계에 이르렀던 이스라엘.시리아 평화협상은 중단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바샤르의 권력기반이 안정될 때까지 평화의 전망은 불투명해졌다.

골란고원의 남쪽 끝자락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시리아 영토가 북쪽과 동쪽에서 호수를 에워싸고 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사드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갈릴리를 따라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일만 남겨두고 있었다.

힘든 협상이었지만 아사드와 바라크의 평화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었다.

1994년 남북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시점에 김일성(金日成)주석이 사망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찾는 역사(役事)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권력기반이 안정될 때까지 7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과 같다.

평화의 장애물은 이스라엘 국내정치에서도 돌출했다.

바라크 총리의 노동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7개 정당의 하나인 샤스당이 평화협상과는 상관없는 교육문제로 연립정부를 위기로 몰아 바라크의 협상입장을 크게 약화시킨 것이다.

바라크는 오는 9월께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아라파트와 평화협정에 조인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지만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중동평화가 어려운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팔레스타인 자치정부.요르단.시리아와 따로 따로 협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이해가 달라 일괄타결이 안된다.

이집트와는 79년 평화협정을 체결해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줬다.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프로세스는 77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데서 시작됐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의회에서 히브리어로 연설해 이스라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스라엘 베긴 대통령의 이집트 방문이 뒤따랐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평양방문에 이어 예상되는 金위원장의 서울방문에 해당된다. 金위원장이 서울에 올 경우 국회연설을 기대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프로세스도 극적이었다. 93년에서 94년에 이르는 기간에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밤중에 극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헬리콥터편으로 요르단의 왕궁으로 날아가 후세인왕과 극비의 협상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94년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그리고 사다트와 라빈은 모두 국내 반대파에 의해 암살됐다.

중동에서도 우리는 평화의 출발점은 최고지도자의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라는 것을 확인한다.

거기에 평화를 위한 전략과, 안팎의 도전을 이겨낼 도덕적 용기가 따라야 하고, 협상을 주도하는 지도자의 정치적인 기반의 안정이 필요하다. 金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동도 체제안정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산물이다.

한국을 강타한 통일의 환상은 걱정스럽다. 평화를 생략한 통일은 없다. 통일에 대한 열광을 실현가능한 평화에 대한 지지로 묶어내는 것이 金대통령에게 기대되는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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