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상호주의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김정일(金正日)쇼크' 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도 몇 갈래로 나뉘는 모습이다.

첫번째 부류는 북쪽의 방향 선회를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 는 대통령의 공언을 희망적인 수사(修辭)이상으로 받아들이고 회담성과에 대한 일부의 의문 제기에 대해 "찬물 끼얹지 말라" 고 나무란다.

두번째 부류는 첫번째의 반대쪽 입장에 선다. 평양에서의 드라마는 '쇼' 일 뿐이며 북한의 전략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폄하한다. 6.25전쟁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여기에 속하는 예가 많을 것이다.

세번째는 중간입장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평양회담에서 북한의 변화조짐을 보고 남북관계가 대결에서 화해.협력의 공존관계로 바뀔 가능성을 읽는다.

어떤 평가가 올바른 것인지 일반 국민으로서 판단할 근거는 제한돼 있다.

다만 밝힐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당국자의 말 등 여러 정황에 비춰보면 적어도 변화의 '가능성' 은 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 그렇게 믿고 싶지만 손에 잡히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결과는 미래의 몫일 뿐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가 어떠냐에 따라 후속조치에 관한 입장이 갈릴 것임은 말할 것도 없는데 이 점과 관련해 야당의 입장이 주목된다.

한나라당은 정상회담 전후를 통해 '상호주의' 를 강조해 왔다.

대북 정책에서 상호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북한에 대해 일방적인 시혜적 정책을 피해야 한다는 넓은 의미에서라면 상호주의 원칙을 긍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구체적으로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따져보면 반드시 명백한 것은 아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남쪽은 북쪽에 경제지원을 하고 그 대가로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을 기대해왔다.

그런데 경제지원이 계량화된 개념인 것과 달리 군사적 긴장완화나 평화공존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일정액의 경제지원에 대해 얼마 만큼의 상응 조치를 상호주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만일 기본태도의 차원에서 열개를 주고 열개를 받겠다는 것이 상호주의라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상호주의를 등가적(等價的)이고 대칭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한 과연 남북관계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한편 상호주의를 형식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대표적인 예로 국가보안법 문제를 들 수 있다. 애초에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북쪽의 태도에 관계없이 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왔다. 여기에 대응해 나온 것이 상호주의론이다.

남쪽의 국가보안법과 헌법의 영토조항만이 아니라 '반혁명범죄' 를 규정한 북한 형법 및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밝힌 노동당규약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평양회담에서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북한형법의 반혁명범죄 조항이나 노동당규약이 바뀐다면 이것은 중대한 변화의 조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의할 점이 있다. 북한에서 법이 갖는 의미는 남쪽에 비해 큰 차이가 있다.

김일성 저작에서 '법은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북한 '재판소구성법' 에서는 "재판소는 조선노동당의 지도 하에… 활동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북한에서 법의 지배는 원칙차원에서조차 수용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북한형법 개정과 보안법 개폐를 똑같은 차원에서 놓고 볼 것은 아니다. 한편 노동당규약은 북한에서 헌법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만큼 그 개정 여부는 북쪽의 태도변화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규약개정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전체적 맥락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

줄여 말하면 보안법 개폐문제에 형식적이고 부분적인 상호주의에 따라 대응할 것이 아니라 북쪽의 대남 위협에 대한 총체적 평가 차원에서 판단해야 한다.

상호주의가 대북 정책에서 의미 있는 개념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등가적.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非)등가적.비대칭적인 것이어야 하고, 형식적.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총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양건 <한양대 법대학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