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휴가 가고싶어 가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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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민 생명을 담보로 폐업에 앞장선 병원측이 직원들에게 강제 휴가를 명령하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요즘 광주광역시 K병원 직원들은 병원측 처사를 지켜보며 과연 이 시대 의료기관에 '히포크라테스 정신' 이 살아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이 병원은 의사 1백66명 가운데 과장급 이상 52명만 남긴 채 모두 폐업에 들어가 환자를 돌볼 인력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간호사 등에게 휴가를 사용토록 종용하고 있다.

중환자실.응급실을 제외한 10여개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1개월 근무표에서 동그라미가 표시된 날에는 휴가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병원측이 직원들에게 휴가일 지정을 요구하면 '별수없이' 날짜를 정하고 마음 편치 않은 휴가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간호사만 휴가 대상자가 아니다.

방사선기사.임상병리사.조무사.원무 종사원 등 전체 직원이 온 나라가 의료대란으로 법석인데도 병원측 요구에 따라야 한다.

직원들에 따르면 의사를 제외한 근무자 5백여명 가운데 23일 현재 1백60여명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1~2일간 휴가를 다녀왔다.

"의사들의 폐업으로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도 못해줘 가슴 아픈데 휴가까지 강요당해 마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불이익을 당할까봐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이 병원 간호사 A씨의 하소연이다.

이 때문에 간호사협회 광주시지부는 23일 '간호사는 주변상황에 동요말고 정의롭게 순수한 마음으로 본분을 다하자' 는 나이팅게일 선서가 담긴 공문을 일선병원에 보내기도 했다.

간호사들이 앞장서 환자 돌보기에 최선을 다하는 등 의연히 행동하자는 취지에서다.

한편 K병원 관계자는 "일부 간호사들이 환자가 없어 자발적으로 휴가를 갔다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며 "병원이 강제로 휴가를 가라고 한 적이 없다" 고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는 속담이 생각난다.

앞으로 의사들은 환자들의 낯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을지 걱정된다.

구두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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