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 교수의 평양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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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나는, 그리고 후세의 언론사가들은 오늘 TV를 지켜보았던 체험을 이렇게 전할지 모른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을 보았고, 순간 TV에 감전됐다."

끊임없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었다. 우리의 눈 앞에서 이뤄진 그것은 '역사' 였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의 불명예를 일거에 떨쳐내 버린 '사건' 이 오늘 벌어졌다. 활자의 이성이 침범할 수 없는 감성, 감동의 리얼타임이었다.

구운 것, 데운 것이 결코 줄 수 없는 '날 것의 미학' 이 거기에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기계의 메커니즘이 합작해 이뤄낸 전율의 시간이었다. 정열과 정성과 정기가 한군데로 모여 만들어낸 쾌거였다.

TV를 지켜보는 가운데 북청이 고향인 88세의 고모님이 눈물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셨다.

"보았니? 보았어?" 평양의 하늘빛은 맑았고 두 정상의 표정은 의연했으며 환영의 꽃물결은 출렁거렸다.

"만세. 만세. " 만남이 하루 연기된다고 전해왔을 때 그 기대, 그 희망이 모두 연기로 변하는 게 아닐까 내심 두려웠다.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미끄러져 내리고 대통령 부부가 트랩을 내려올 때 비로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수천, 수억의 눈동자는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TV엔 비치지 않았지만 남북의 정상이 손을 잡는 순간 시청자의 망막 앞에 오버랩 되는 영상들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포연, 임수경의 얼굴, 북으로 가는 이인모 노인, 소떼, 그리고 불과 며칠 전의 평양학생소년예술단.교예단의 노래와 묘기…. 문제는 이같은 감동이 아니라 감동 그 이후다. 열광의 끝은 의외로 긴 허무와 맞닥뜨릴 수 있다.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에 도달하기까지 무려 55년이 걸렸음을 헤아린다면 앞으로의 55년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역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중요하다. 어느 기업가의 말이 자꾸만 가슴을 때린다.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미스터리며 오늘은 선물(gift)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고 말한다."

남은 일정 동안 TV가 전해올 평양의 화면들을 그래서 더 주목하려고 한다.

통일로 가는 길에서 온국민을 생생한 역사의 목격자로 만들어줄 TV의 선물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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