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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역사소설 만화로 재창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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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토지' 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일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역사를 바라보는 명확한 사관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상업적 속성이 강한 만화계에서 역사만화를 고집하기란 웬만한 작가정신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잡지 연재를 전제한다고 하더라고 무척이나 고단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당대에 사용되던 언어의 재현과 그림을 위한 자료 수집만도 방대한 규모다.

실제 작가 이두호는 "갓 하나 그리는 데도 자료를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 며 " '객주' 를 연재하면서 만든 우리말 노트가 수십권에 달한다" 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점이 또한 젊은 작가들이 역사만화에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만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와 60년대. 조선시대가 배경인 '엄마 찾아 삼만리' 와 '도망자' '곰보 부자' '라이파이' 등이 당시의 대표작이다. 그러다가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역사만화는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볼만한 역사만화를 작품별로 살펴본다.

◇ 주먹대장(김원빈 작)〓73년부터 10여년간 만화잡지 '어깨동무' 에 연재됐던 '주먹대장' 은 역사만화라기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옛 이야기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주먹대장' 을 거론하는 까닭은 캐릭터의 성공이 의미있기 때문이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한쪽 주먹이 비정상적으로 큰 캐릭터가 주는 친숙함이 이후 독자와 사극 만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데 일조했다" 고 설명한다.

◇ 임꺽정.일지매(고우영 작)〓소설 '임꺽정' 을 각색해 스포츠 신문에 연재했던 작품. 기존 질서에 맞섰던 의적들을 소재로 삼았으나 출판물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상업적 고려로 인해 저항적 이미지는 탈색해 버렸다.

하지만 속담과 농담을 통해 시도한 지배자에 대한 풍자와 해학성은 녹아 있다.

한컷과 네컷짜리가 전부였던 당시 신문만화에서 하루 25칸씩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국 고전을 풍자적으로 재해석한 '삼국지' 와 '수호지' 등이 있다.

◇ 임꺽정(방학기 작)〓고우영의 '임꺽정' 이 대륙적이라면, 방학기의 '임꺽정' 은 한국적이다.

어린 시절 만주에 살았던 기억이 있는 고씨와 대조적으로 방씨의 고향은 경남 밀양이다.

백성민은 이에 대해 "방학기 선배 작품의 한국적인 분위기는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정경에서 빚어지는 것" 이라며 "고답적인 분위기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작가는 없다" 고 설명한다.

다른 '임꺽정' 작품에 비해 서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 임꺽정(이두호 작)〓활극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 벽초 홍명희의 원작 소설에 충실한 만큼 민초와 관군의 조직적 대립 구도를 강하게 그렸다.

임꺽정이란 인물이 내포하고 있는 저항적 이미지는 이두호의 '임꺽정' 에서 절정에 달한다.

보부상들의 생활을 통해 민초의 삶을 그린 김주영의 원작 소설을 만화화한 '객주' 도 이씨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 장길산(백성민 작)〓황석영의 원작 소설에 충실한 작품. 백씨는 "처음에 잡지 연재를 시도했으나 작품성이 훼손당할 우려가 있어 그만뒀다" 며 "얻은 것은 작품의 진정성이고, 잃은 것은 만화적 재미" 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백씨는 자신의 그림체가 자리잡았다고 귀띔한다.

서울문화사의 김문환 부장은 "국내 만화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진지한 작품이지만 만화적 재창조가 약했던 점은 아쉬운 대목" 이라고 말한다.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박흥용 작)〓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서얼 출신인 주인공 견자가 검술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뿐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다.

여백의 활용이라는 동양화적 특성을 그림에서 십분 살리고 있으며, 한컷에 담아내는 의미의 무게가 놀랍다.

◇ 토끼(백성민 작)〓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특별한 영웅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평범한 한 민초의 눈으로 홍경래의 난을 그리고 있다.

조선시대 내내 소외됐던 평안도 지방의 민심에 기반한 민초들의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풀어간다.

◇ 삐리(백성민 작)〓임꺽정을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은 갖바치 출신의 '삐리' 라는 인물이다.

'삐리' 는 남사당패에서 여자 행세를 하는 남자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제3자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벽초의 원작 소설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빠지는 이들도 많다. 철저히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작품을 집필하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타고난 영웅이 아니라 사회적 불합리가 그의 반골 기질을 키워주었다는 식의 해석이 설득력을 더한다. 한 컷의 그림이 한 페이지를 차지할 만큼 대담한 연출도 눈에 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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