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내부의 혼선을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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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가 야당의 입장을 밝혔다.

북한과 우선적으로 협의해야 할 사항으로 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이산가족 문제 이외에도 북한의 인권 문제, 핵.미사일.화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의 폐지 등을 강하게 거론했다.

李총재는 상호주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경제 지원도 북한이 이를 군사적으로 전용하지 않는다는 보장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李총재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방북기간 중 북한의 1인체제를 유지.강화하는 행사의 참석 등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나 안보를 위협하는 타협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우리는 李총재의 이런 주문이 정상회담 무드에 묻혀 있는 보수적 중산층의 일반적인 우려를 대변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북한에 대해 인권의 신장을 요구하고 납북자나 국군 포로의 생사 확인과 조기 송환을 요구하는 것, 대량 살상무기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 등은 필요한 조치다.

다만 그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에서는 완급이 있고 선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당이 이처럼 보수적인 입장을 견고하게 주장하면 초당 협력이라는 것은 말뿐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과도한 정서적 흥분과 이를 부추기는 듯한 홍보가 우리 내부에 커다란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점도 없지 않다.

정상회담의 성사에 이어 최근 북한 합창단과 교예단의 서울공연까지 곁들여져 남북간 정서적 접근의 폭이 크게 넓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두 정상의 만남을 가상해 이뤄지고 있는 일부 매체의 보도들은 곤궁한 상상력과 과장된 흥분으로 인해 이성적 한계를 벗어나는 측면까지 보이고 있다.

아무런 정서적.제도적 준비도 없이 이뤄지고 있는 이런 갑작스런 변화가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에게 혼선을 주고 자칫하면 오히려 반감을 조성할 측면도 없지 않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주변국들의 동향을 보면 남북간의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듯 민족적 감정 하나로 쉽게 풀어질 수 없는 문제임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표면적으로 성공을 빌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걱정과 우려의 신호를 노골적으로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키로 했다는 소식은 마치 조선을 둘러싸고 주변국들이 각축하던 한말(韓末)의 풍운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다.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남북 정상회담을 단순히 감성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

金대통령은 내부의 이같은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잘 판별해 대북 교섭과 주변의 국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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