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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연주가와 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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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과천과 서울 강남을 잇는 양재천변의 산책로를 겸한 자전거 길은 도로보다 약간 아래에 있으면서 소음을 막고 바깥의 복잡한 풍경이 보이지 않게 설계돼 전원 속의 한가함을 느낀다. 이 아름다운 천변 길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색소폰 연주가를 만났다. 초로의 이 연주가는 70·80세대의 귀에 익숙한 팝송을 들려줘 강변 풍경과 어울리는 서정을 연출했다.

거리의 연주는 소란 속의 소음도 아니요, 음악당의 격조 높은 선율도 아니면서 도심의 파격이요, 과객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시화호 갈대숲에서 고라니를 만났을 때만큼 흥분되지는 않지만 장소성이랄까…. 천변의 연주가는 전원의 분위기와 어울렸고 위안을 준다. 그곳은 그를 위한 공간처럼 보인다. 원생(原生)의 자연도 좋지만 사람이나 건물이 있어 정처를 제공하는 자연도 좋다.

자세히 보니 그 앞에는 헌금함이 놓여 있다. 아! 저이는 연주해 주고 돈을 받는구나…. 그러나 별로 싫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는 정이 있는데 어찌 가는 정이 없겠는가. 얼마 동안 들을 것인가, 또 사례금을 놓고 안 놓고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니 부담이 없다. 자기의 재능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돈을 받는다는 일은 바로 직업이 아니겠는가.

이런 풍경에 비하면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 안에서 만났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볼썽사납지는 않지만 약간 부담스러웠다. 열차의 소음도 그렇지만 승무원의 눈길을 피해 촌음의 연주를 하고 모자를 돌리는 일련의 모습이 넉넉하게 보이지 않아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그의 재치와 싹싹함이 어색함을 무마해 다행스럽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지나가면서 돈을 받는 시각장애인을 볼라치면 분심이 든다. 음악이라는 서비스를 주고 대가를 받는지, 아니면 자기 존재를 알리는 수단으로 음악을 이용하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지갑을 꺼낼 겨를도 없이 휙 지나가지 말고 잠시라도 제자리에서 짧은 한 곡을 선사하면 훨씬 더 많은 정이 오고 갈 수 있을 텐데….

서울의 지하철 객차에서 적선을 청하는 장애인을 만나면 막다른 감정의 길목에 다다른다. 돈을 줘도 “고맙다”는 표시가 없다. 감동까지는 아니라도 구하는 사람의 정성이 깃들면 지갑을 여는 일에 인색함이 덜할 텐데 ‘오는 정’이 아쉽다. 경전에는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이른다. 오는 정이 없더라도 서운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갑을 열 때 나름대로의 기준이 내게 생겼다. “고맙다”는 뜻을 표하는 사람을 서운하게 대하지 않는다. 누구나 세모가 아니라도 온정을 베풀 수 있고 정초가 아니라도 “복 많이 받으시라”는 기원을 할 수 있다면, 또 천사가 빌어 주는 복과 걸인이 빌어 주는 복의 무게가 다르지 않다면, 온정을 베푸는 사람에게 “복 많이 받으시라”고 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내리사랑’처럼 ‘오는 정’ 없이도 ‘가는 정’이 있다. 한 달에 전골냄비 한 그릇의 돈이면 거의 매일 거리의 온정을 베풀 수도 있다. 잔돈이 없어 큰돈을 줄 때도 있고, 큰돈을 받고 고마워 어쩔 줄 모르는 천사를 만날 때도 있지 않겠는가. 서비스 정신은 위기에 빠진 현대사회의 메마른 인간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