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송년기획 해외 경제 석학 릴레이 진단 ② 경제위기가 고용시장에 미친 영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굴욕적으로 은퇴하는 일부 은행가에겐 막대한 보수가 위안이 될 것이다. 5500만 달러의 퇴직수당을 받아 챙긴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최고경영자 켄 루이스나 2500만 파운드의 연금을 획득한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의 최고경영자 프레드 굿윈 등이 그런 예다. 정부의 구제금융과 지급보증, 낮은 이자율에 힘입어 많은 은행은 다시금 경영진에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번 경제위기의 큰 피해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따라 유연한 고용체제를 택했던 선진국의 근로자들이다. 2007년부터 2009년 10월까지 미국에선 거의 800만 개의 일자리가 줄었다. 그 바람에 고용률은 63%에서 58.5%로 추락했다. 2009년 말 실업률은 10%를 웃돌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일본 등 여타 선진국들도 심각한 실업 사태를 맞았다. 스페인이 그중에서도 실업률 상승 폭이 가장 컸다. 비정규직 근로제가 만연한 스페인에선 미국만큼이나 손쉽게 근로자를 해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스웨덴·한국 등 일부 국가는 해고를 자제하는 기업에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함으로써 실업률에 물타기를 했다. 단기적으론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경제회복기에도 고용은 더디게 개선됐다. 미국의 경우 빌 클린턴 행정부에선 90년대 말 닷컴 붐이 올 때까지 고용 없는 회복이 지속됐다. 조지 W 부시 집권기에도 2001년 극심한 경기 침체에 뒤이어 고용 없는 회복이 재연됐다. 90년대 초반 스웨덴은 주택시장 거품과 금융위기로 촉발된 심각한 불황을 겪었다. 그 결과 스웨덴의 실업률은 90년 1.8%에서 94년엔 9.6%로 치솟았다. 위기 후 16년이 지난 뒤에도 실업률은 여전히 6.2%로 90년의 세 배 이상이었다.

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 대해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고금리와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강요했다. 이후 고용이 회복되긴 했지만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이었다. 그 결과 그만그만했던 한국의 소득 불평등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미국에 이어 둘째로 높아졌다.

고용시장의 불안정은 나라 경제와 개인 복지에 큰 손해를 끼친다. 생애 첫 일자리를 찾기 힘든 젊은이와 일자리를 잃은 숙련 노동자들은 평생에 걸쳐 지속될 경제적 손실을 겪게 된다. 소위 ‘행복학’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직은 가족의 죽음 못지않게 행복을 빼앗아 간다고 한다.

미국이 가까운 시일 내에 완전고용을 회복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93~98년 사이 미국은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고용률은 5.4%포인트 상승했다. 만약 내년에 그 같은 속도로 고용이 늘어나기 시작한다고 해도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2015년은 돼야 할 것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고실업의 시대는 유연한 미국식 경제모델의 명성을 깎아내렸다. 90년대 초반 이후 많은 전문가는 낮은 노조 가입률, 해고가 자유로운 고용 형태, 높은 이직률이야말로 미국이 EU 국가들보다 실업률을 낮게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봤다. 많은 OECD 국가가 미국 경제를 따라잡을 요량으로 비슷한 개혁을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연성을 고용 창출의 주된 비결로 보는 시각은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번 위기로부터 배울 교훈은 명확하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노동시장이 아니라 금융시장이었다. 노동시장의 실패는 기껏해야 사회에 그저 그런 비효율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실패는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재앙을 불러온 자들보다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큰 고통을 안기면서 말이다. 더욱이 세계화는 미국 금융시장의 실패가 전 세계에 불행을 전파하게 만들었다.

이들 근로자를 봐서라도 우리는 금융업자들 배만 불리지 않고 실제로 경제를 살찌우는 금융을 재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융 분야의 인센티브와 규칙을 개혁해야 한다는 얘기다. 경제와 일자리가 위기에 처한 다른 나라의 국민도 미국이 제대로 된 금융개혁을 실시하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Project Syndicate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경제학

◆리처드 프리먼(Richard B Freeman)=미국의 대표적인 노동경제학자.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런던정경대·예일대 등에서도 강의했다. 국제적 노동 기준, 범죄의 경제학, 인터넷이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해 300여 편의 논문과 저서를 내는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