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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강연장’으로 변한 키코 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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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은행의 권유로 통화옵션파생상품 ‘키코(KIKO)’에 가입했다 손실을 본 중소기업들이 은행의 책임을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증언대에 섰다. 200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엥글(67)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원고인 도루코 측 증인으로 나와 키코 상품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순차 통역으로 진행된 이날 재판은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엥글 교수는 “키코 계약은 은행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기업에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키코 계약이 공평하다고 보느냐”는 원고 측 변호인의 질문에 엥글 교수는 “수수료를 감안한 키코 풋 옵션은 환율이 급락하면 무용지물이다. 공평한 계약이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도루코를 비롯한 17개 기업의 키코 계약을 분석한 결과 기업에 극히 불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기업이 입을 수 있는 최대 손실금액은 은행보다 평균 100배 정도 높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은 경제학 강의실 같았다. 원·피고 양측은 각자 통역사를 데려올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양측 모두 엥글 교수의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법정에 프레젠테이션용 화면을 띄워 놓고 그래픽과 수치를 제시하며 답변했다.

엥글 교수의 출석은 원고 측이 법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사됐다. 원고 측 변호인은 키코 상품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이번 소송의 법적 쟁점으로 삼았다. 키코가 처음 설계될 때부터 기업에는 불리하고 은행엔 유리한 ‘불공정’한 상품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이 분야 권위자를 수소문하다가 지난해 말 노재선 KAIST 교수와 최병선 서울대 교수에게 상품 분석을 의뢰했다. 노 교수가 작업 과정에서 유학 시절의 스승인 엥글 교수에게 조언을 구하다가 아예 엥글 교수가 분석에 참여하게 됐다. 코넬대 로버트 재로 교수와 휴스턴대 스튜어트 턴불 교수도 이에 가세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이번 재판의 당사자를 포함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17개 기업과 9개 은행이 체결한 키코 계약서를 분석했다. 이달 초 재판부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보고서 작성자 중 엥글 교수가 대표로 법정에서 진술하게 됐다. 기업 측 대리인인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김성묵 변호사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통상 받는 대가에 비하면 ‘껌값’ 수준의 적은 보수로 엥글 교수가 분석을 맡아줬다”고 전했다.

서울중앙지법에는 140여 건의 키코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날 엥글 교수가 법정에서 밝힌 의견은 이번 재판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각종 키코 재판에 증거로 제출될 예정이다.

피고 측도 ‘석학 카드’를 들고 나왔다. 우리·외환은행은 이날 스티븐 로스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학원 교수를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고 재판부에 신청했다. 두 은행은 로스 교수를 변동성과 옵션 가격 결정 이론 등 파생상품에 관한 전문가로 소개했다.

박현영·박성우 기자

◆로버트 엥글=2003년 클라이브 그레인저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경제성장 지표와 가격·금리·이자율 등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경제변수의 분석 기법을 한 차원 높이고, 미래 예측과 리스크 평가를 개선해 경제 예측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윌리엄스 칼리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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