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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38. 영원한 '라이벌'

탑골공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노인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자리였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언제부턴가 모이기 시작한 노인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정치적 소신을 발표하고 또 심심풀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 '중앙 노인정' 같은 역할로 더 알려진 곳이다.

가게가 바로 탑골공원 뒤쪽이지만 그렇다고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다.

'근친혐오증' 이란 말처럼 '근처기피증' 이란 말도 있음직한데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안가는 그런 곳이 탑골공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 우연히 가보고 난 뒤에는 그곳에 가끔 들렀다. 우선 담장 하나에 가려져 있지만 현대식 도시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고 또한 그곳에 가족과 한나절을 떠나 있는 것이 일인 많은 노인들이 모여있는 풍경이 좋았으며 그러다가 가끔 생기는 싸움도 왠지 정겨워 보였다.

물론 그분들이야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일 테지만 싸우는 이유가 터무니 없는 경우가 많아서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싸우는 진지파나 투사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장기판이니 바둑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훈수를 두지 말아야 할 때 했거나 한 수만 물러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짓밟은 야속한 사람이란 것이 주된 이유였으니 얼마나 재미 나는가.

한때는 모두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주름을 잡던 분들이 이제는 그런 날과 경륜을 후대들에게 넘겨주고 장기판 말의 생사에 목숨을 거는 모습!

얘기가 길어졌지만 탑골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 만나면 대개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영 시인이다. 민선생은 신경림 시인에게 주로 시비를 걸었는데 대개는 키와 관련된 말이었다.

"야 꼬마야! 너는 어려서 얼마나 못먹어서 그리도 작누?"

"하이 요놈 봐라. 완전 땅꼬마가 어른한테 꼬마란다. 민영이 지가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큰체 하는걸 보면 우스워 죽겠어. "

그런 때에 젊은 이승철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선생님들 신발 벗고 방으로 들어오시죠. 오늘은 정말 두분 중에 어떤 분이 크신 것인지 결판을 내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이런 때에 김규동 선생님도 모시면 좋은데. " 그런 말에 한 분은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온다.

"민영이 너부터 들어가, 내 들어갈테니. "

"경림이 니가 들어와야지. 너 안들어 올라고 그러지?"

"뭐야. 저번에 내가 들어가서 재보자고 했을 때 안들어 와놓고!"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두 분의 키재기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서로를 힐난하는 것같으면서도 눈에서는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을. 그러므로 두 분의 키재기는 영원한 숙제라는 것을. 그렇게 한바탕 하고나면 술자리는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다니는 민선생은 별로 술을 안하시지만 신경림 선생님은 꽤 술을 드시는 편이었다.

특히 두 분 모두 젊은이들의 생각을 많이 존중해주는 편이었고 가끔은 따끔하게 작품 얘기도 하는 편이어서 그런 때는 2차, 3차도 기꺼이 가셨다.

그런 때에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묻곤 했다.

"두분 선생님들 언제나 서로 키가 크시다고 하시는데 정말 누가 크신겁니까?"

그러면 언제나 답이 똑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 그리고, 보면 몰라? 내가 더 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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