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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건설업] 下. 체질 바꿔야만 살 길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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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29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 건설산업연구원이 주최한 '서울시 도시계획 조례안 마련에 따른 건설업계의 대응 방향에 관한 좌담회' 분위기는 침울했다.

대림산업 송시권 상무는 "건설경기가 장기 침체한 상황에서 건축기준을 강화해 주택사업마저 꽁꽁 묶으면 살길이 막막하다" 고 호소했다.

수주할 일감이 없어 야단인데 그나마 효자 노릇을 해온 수도권의 주택사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해에 5백여개씩 쓰러지는 건설업계에선 말 그대로 생존이 당면과제다.

국토연구원 김재영 건설경제연구실장은 "건설업체가 살아남으려면 체질을 선진국형으로 바꾸는 길밖에 없다" 고 잘라 말했다.

그는 우선 여기저기 손대는 백화점식 사업관행에서 벗어나 경쟁력 있는 핵심 부문에 매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공이면 시공, 주택이면 주택 등 전공분야에 전력투구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길 수 있는 수준까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형 건설사는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노동집약적 경영형태에서 탈피해 소수 정예 기술자가 이끄는 종합개발사업관리(PM)나 개발업자(디벨로퍼), 공사 전반을 관리하는 건설사업관리(CM)전문업체로 변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업계는 부동산투자신탁(REITs)과 민간에도 택지개발사업 참여의 길을 열어준 도시개발법이 본격 시행되면 건설업체의 갈 길은 크게 두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사는 기획에서부터 자금조달.설계.공정관리.부동산 운용 및 관리 등 사업의 전과정을 도맡아 처리하는 PM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단순 도급공사는 중견 이하 업체에 맡겨야 한다.

개발이 아닌 순수공사 분야라도 시공업은 손을 떼고 기획.공정관리.감리.감독기능을 일괄 처리하는 CM분야에 치중해야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분석이다.

건설교통부도 해묵은 숙제인 국내 건설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현재 30여종으로 나뉜 건설업 영역을 CM과 단순시공 등 두분야로 나누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정부는 특히 CM제 도입을 통해 설계.시공.감리.감독 등 여러 단계인 건설공사 공정을 단순화 해 간접 공사비 등 건설원가를 줄일 방침이다.

한국건설정보시스템 김헌동 사장은 "건설업 영역을 단순화하면 간접 공사비를 지금보다 20~30% 정도 줄일 수 있다" 면서 "영국.일본 등 선진국들은 벌써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 말했다.

건설업체의 구조조정이나 업역(業域)단순화만으로 건설업계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입찰제도 개선이다. 적정 공사비를 산출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우선 기술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관급공사 발주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기술력보다 경영평가를 중시하는 입찰제도 때문에 부채 동결 등의 혜택을 받는 법정관리.워크아웃 대상업체가 입찰과정에서 유리한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공사비도 현실화해야 한다는 게 건설업계의 주장이다. 발주기관이 공사비를 제대로 주는 대신 감독을 철저히 해 부실 시공이 발붙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원가에도 못미치는 공사비를 책정함으로써 적자 시공 아니면 부실공사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규제완화 이후 급증한 건설업체도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정된 일감을 서로 나눠먹는 식으로 가다간 결국 대부분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원리에 맡겨놓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남을 회사, 도태될 기업 등으로 자연 정리되겠지만 건설업의 속성상 회사 도산이 몰고 오는 경제.사회적 파장이 적잖아 마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건설협회 최윤호 기획실장은 "신설업체 가운데 공사를 따 수수료만 챙기고 바로 일괄 하청주는 브로커 형태의 회사가 많다" 면서 "한시적으로 건설업 등록기준을 강화해 무분별한 진입을 일단 막을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최영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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