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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낭만 넘친 '중년문화' 기획 늘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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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결혼을 하고 10년 넘게 한 눈 팔지 않고 회사 생활도 충실히 했다. 그 덕에 내 집을 갖게 됐고 회사에서는 웬만큼 인정도 받고 있다. 퇴근하면 마음씨 고운 아내와 착한 딸이 반겨준다. 그런데도 왜, 왜 이리 허전하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이. "

집과 직장밖에 모르고 살아온 40대 직장인. 어느 날 그는 반듯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회의하고 무력감에 빠진다.

그러다 퇴근 길 지하철에서 창 너머로 보이는 댄스 교습소의 불빛에 눈길을 뺏긴다.

사실은 교습소 여강사의 외로운 표정에 끌린 것이지만 아무튼 이날 이후 퇴근 후 교습소에 들러 '슬로 슬로 퀵 퀵' 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사교 댄스의 묘미를 알아 가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주인공의 얼굴엔 핏기와 생기가 살아난다.

중년의 쓸쓸함엔 국적이 없다. 최근 개봉한 일본 영화 '섈 위 댄스(Shall We Dance?)' .일본에서 2백만명 이상이 본 '섈 위 댄스' 는 미국에서도 외국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했다.

개봉 4주째 접어든 한국에서는 아직 폭발적인 반응은 관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년층에게는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 수입사인 AFDF 강혜정 홍보실장은 "국내 영화들은 대부분이 20대 초반을 주관객층으로 잡고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년들이 극장에 갈 기회가 거의 없는데 '섈 위 댄스' 는 중년 직장인의 심리와 애환을 잘 표현한 탓인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 설명했다.

지난 25일 밤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 아트센터.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모키 조스 카페' (31일까지)가 공연 중인 이 곳에는 객석의 절반 가량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층이 채우고 있었다.

이들은 흥겨운 리듬에 맞춰 박수를 쳤고, 일부 관객은 나이를 잊은 듯 연신 엉덩이를 들썩이며 가볍게 춤을 추기도 했다.

'스모키 조스 카페' 는 50~6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로큰롤과 올드팝 40여곡을 들려주는 뮤지컬. '찰리 브라운' '러브 포션 넘버 나인' '스탠드 바이 미' 등 팝 애호가들에게 익숙한 곡들이 다수 연주됐다.

'스모키 조스 카페' 는 뮤지컬에 대한 국내 공연계의 고정 관념을 깨뜨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뮤지컬은 10~20대의 전유물이라는 '상식 아닌 상식' 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고 나온 사업가 백호영(55)씨는 "TV가 귀했던 시절 라디오에 귀를 쫑긋 들이대고 팝송을 들었던 젊은 시절로 훌쩍 돌아간 느낌" 이라며 즐거워했다.

LG아트센터 김주호 부장은 "직장이나 동창회, 부부모임 등 단체 관람도 20여건에 이르는 등 반응이 좋다" 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 중.장년층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은 설이나 어버이날에 맞춰 무대에 올리는 악극이나 트로트쇼 등이 대부분이었다" 며 ' "이제는 우리도 경제적 여유를 갖춘 40대 이상을 주 타깃으로 다양한 공연을 마련해야 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중년문화' 가 살아나고 있다. 그동안 10대 문화에 눌려왔던 중년들이 문화적 욕구를 표출하려는 움직임은 TV.공연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에서 나오고 있다.

금요일 밤 KBS2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낭만에 대하여' 가 그 중 하나. 지금까지 4회가 나간 이 프로는 30, 40대들를 위한 프로로 자리잡았다.

가수 전영록이 사회를 맡고 김세환.서유석.하남석.송창식.이용복.어니언스 등 70년대 포크 가수들을 주로 초대하는 이 프로에는 벌써 매니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 "녹화장에 어떻게 갈 수 있느냐" 고 물어오는 부부들도 많고 녹화장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온다는 것이다.

'이소라의 프로포즈' 가 미혼 연인들의 프로라면 '낭만에 대하여' 는 기혼 부부들의 프로로 정착하고 있다.

이전에 '도전! 주부가요 열창' 을 담당하기도 했던 박영규(45)PD는 "8년전부터 이 프로를 기획했으나 시청률을 의식한 방송사측의 고려로 매번 밀려났다" 며 "이제 중년문화에 대해 관심이 활발해진 만큼 이 프로를 통해 중년들에게 공감대를 찾아주고 싶다" 고 의욕을 밝혔다.

대형 무대나 TV뿐 아니라 중년만을 위한 일상적인 공간도 늘고 있다.

하남시 미사리나 일산 등지에는 중년들이 자주 찾는 라이브 카페가 몰려 있지만 조용한 도심 주택가에 들어선 경우도 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자리잡은 카페 '옛 이야기 속에' 는 입구 유리문에 '중년을 위하여' 라고 하얀 글씨가 써 있다.

대형 피아노와 기타, 올드 팝을 주로 들려주는 뮤직 박스까지 갖춘 50평 규모의 이곳에는 저녁 여덟시가 되면 주인 한병천(48)씨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다.

단골 고객은 40명 정도. 주변에 사는 부부들을 비롯해 소문을 듣고 분당이나 안양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대구.부산 같은 지방에서도 한달에 한 두번씩 찾아오기도 한단다.

여기서 만난 한 주부는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도 편안히 음악을 즐길 수 있고 때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자주 찾는다" 고 말했다.

카페를 연 지 1년반이 됐다는 한씨는 "남성들은 대개 잘못된 술문화에 젖어 여가를 뺏기고 있고 여성들은 마땅한 문화 공간을 찾지못해 방황하는 것이 지금 중년들이 처한 상황" 이라면서 "요란스럽게 술먹고 노래 부르지 않더라도 차분하게 대화하고 사색하며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고 말했다.

최근 유익종 콘서트를 기획한 플레너사 대표 안태경(42)씨는 "중년문화의 부재는 수요자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 라고 지적한다.

양희은.정태춘-박은옥.안치환 등 30대에서 50대를 겨냥한 기획을 주로 해 온 그는 콘서트를 열 때마다 성황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만큼 중년들의 문화에 대한 향수나 욕구는 높은데 이를 개발하는 마케팅과 상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10대 문화와는 달리 중년 문화는 '한번 팬이면 영원한 팬' 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40대 이상의 세대는 우리나라에 대중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여명기에 청년기를 보낸 만큼 극장이나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앞 세대보다 훨씬 익숙해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화적인 동질성을 포착하고 끌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 라고 진단했다.

이영기.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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