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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산책] 처마밑 제비식구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눈석이에 버들개지가 눈을 뜬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아카시아꽃 향이 짙어지고 날리는 송홧가루에 봄이 스러지고 있다.

들판마다 모내기가 끝나가고 있는 걸 보면 강남갔던 제비가 반공중을 가로날고 세로날아 시골의 봄그림을 마무리하게 마련인데 사방하늘을 둘러봐도 횅댕그렁하기만 하다.

삼월삼짇날이 지난지 달포가 더 되건만 하늘엔 공해의 자국뿐 응당 있어야 할 제비가 보이질 않는다.

오마지도 않은 님이 일도 없이 기다려지듯 마음이 꼭 그 짝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공중에 눈말뚝을 한채 김포벌을 누비며 서쪽 땅끝인 이곳 보구곶까지 훑었으나 역시나다. 제비 후리러 나갔다 헛탕친 놀부기분이다.

자연의 앙갚음이 시작되는 걸까. 섬뜩하기조차 하다.

한창 통통하게 살이 진 찔레를 꺾어 떫은듯 달착지근한 맛에 혀를 녹이고 은백색의 삘기를 뽑아 껌을 만들겠노라고 논두렁을 헤집다 보면 으레 머리를 스치듯 지나가는 제비와 수십번은 눈을 맞추곤 했던 어릴 적 추억이 새삼 새롭다.

봄이 되면 가장 고대되는 것은 사실 제비다.

꽃이나 새순에 대한 바람도 크지만 역시 날렵한 제비의 날개짓 만큼 약동하는 봄기운을 실감케 해주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삼짇날 제비가 모습을 나타내면 창공을 향해 손을 흔들어 반갑게 맞이하는 풍등(風登)을 했고 제아무리 개구리 합창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요란해도 제비의 "지지배배" 가 없으면 '불사춘(不似春)' 으로 여겼던 게 우리네 봄이었다.

요즘이야 각종 애완동물이 흔한 세상이지만 제먹기도 힘들었던 시절엔 그저 스스로 찾아와 식량 축안내고 깃들여 사는 제비만한 귀염거리도 없었다.

덩치야 고작 한뼘거리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색에 하얀 배를 한, 쪽 빠진 몸매하며 그리 시끄럽지 않은 톤으로 암수가 주고받는 경쾌한 지저귐이라니.

또 진흙과 검불을 엮어 집을 짓는 솜씨나 행여 새끼들이 진자리에 들까 똥을 싸기가 무섭게 물어내는 자식사랑은 어떻고.

여기에다 물을 차듯 몸을 낮춰 날면 십중팔구 비가 오시고, 큰바람과 큰물이 닥칠 량이면 집을 탄탄하게, 안으로 들여지어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기상예보관이기도 했다.

제비는 원래 바람이 차는 곳엔 집을 짓지 않는 법. 그래서 얼마전 까지만 해도 웬만한 시골집마다 대청마루.봉당 위 대들보 언저리나 안채 처마밑엔 두서너채 제비집이 있어 주인과 더불어 살았다. 제비집이 많을수록 풍년이 든다고 믿었을 정도다.

이 땅에 자란 사람치고 아무리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랭이라도 흥부놀부 얘기만큼은 꿰고 있는 것도 다 이 제비를 권선징악의 중개자로 삼은 덕분이다.

한데 어느 때부턴가 이 제비를 눈으로나마 모시기가 어려워졌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진흙집에서 잠자리.모기.날도래.하루살이등속을 먹이로 천연의 삶을 꾸리는 게 이들의 생태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시도 때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연.소음하며, 들판마다 뿌려지는 농약에다 작은 몸뚱이 하나 비가림할 수 없는 아파트. 내가 제비라도 생존문제에 앞서 정나미가 떨어졌겠다.

몇해전이던가, 서울의 한 주택에 레미콘으로 지은 제비집이 화제가 되는걸 보고 속상해 했는데 그새 이리 됐으니…. 에에 - 이, 이 모진 세상 놀부들아, 공해가 죽음에 들게 하는 '보수(報讐)' 박씨인줄 아느냐 모르느냐.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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