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조 그늘 밑, 때 기다린 유비처럼‘빛을 감추고 조용히 힘을 길러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4호 09면

유비와 조조의 대화를 그린 상상도. ‘빛을 감추고 어둠을 키우라’는 뜻의 도광양회(韜光養晦)에 얽힌 이야기를 담았다. 겁을 집어먹은 듯한 표정의 유비(왼쪽)가 젓가락을 떨어뜨리자 오른쪽의 조조가 통쾌한 듯 웃고 있다.

여포(呂布)에게 패해 오갈 데 없어진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에게 얹혀 살았던 적이 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싸움터를 전전하면서 천하 경략의 뜻을 키웠던 유비가 느닷없이 후원의 채마밭 가꾸기에 나선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다 묻는다. “형님, 사내 대장부가 채소 키우는 재미에만 빠진다면 어쩌자는 겁니까?” 유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자네들이 아직 모르는 게 있어….”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 문화-회색(灰色) <1>

의심 많은 조조가 하루는 유비를 불러 술잔을 기울인다. 자칫 잘못하면 조조에게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었던 상황인지라 유비는 마음을 졸인다. ‘조조 입에서 과연 어떤 말이 나올까’. 조조가 주문을 낸다. “요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꼽아 보시요.” 유비는 당시 유명했던 장군들 이름을 몇 개 갖다 댄다. 이를 듣던 조조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한다. “진짜 영웅이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당신일 것이오.”

이 소리에 유비는 음식을 집던 젓가락을 떨어뜨린다. 그 순간 번개가 일자 “두려워서 그만 젓가락을…”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유비. 자신의 말에 낯빛이 변하며 두려움에 떠는 모양새를 보인 유비를 보고 조조의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이 대목에서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 성어가 떠오른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빛을 숨기고 어둠을 키우라는 뜻이다.

계략에 밝고 의심이 많았던 조조에게 몸을 의탁한 유비가 생명을 유지하는 길은 뭘까. 자신의 역량과 재주를 잘못 뽐냈다가는 조조의 손에 목이 달아날 수 있다. 따라서 겁 많은 평범한 남자, 범부(凡夫)로 자신을 위장한 것이다. 이 성어(成語)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대외 전략 분야에서 다시 등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감추고 낮은 자세로 조용히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자는 얘기다. 지금까지 중국 외교의 중심 개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이 도광양회의 처세술을 해석하는 중국 일부의 시각은 이렇다.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근본적으로 의심이 많아진다. 누가 나를 위협하는 사람인가를 먼저 살핀다. 따라서 주변의 신하들은 살아남기 위해 낮은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사람이 내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목숨을 잃는다. 따라서 권부(權府)에서 1인자와 함께 있던 관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 도광양회의 처세를 철저하게 익혔다는 내용이다.

따지고 보면 역대 중국 황제들의 의심은 한이 없었다. 명(明)을 세운 부랑자 출신 주원장(朱元璋)은 자신의 출신과 관련된 소문을 퍼뜨리는 신하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구족(九族)까지 멸하는 방식으로 한꺼번에 수만 명의 목숨을 날리기도 했다. 그에 앞서 송(宋)을 세운 조광윤(趙匡胤)은 왕조를 세운 뒤에 커다란 의심에 휩싸였다. 함께 왕조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건국 공신들이 한결같이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공신들을 술자리에 모이게 했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조광윤은 근심에 싸인 표정으로 “내가 요즘 잠이 잘 오지 않네”라고 말을 꺼낸다. 이어 “누군들 이 황제 자리에 앉고 싶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 황제는 “말 나온 김에 자네들 손에 있는 병권(兵權)을 내게 넘겨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형식은 권유지만 실제 내용은 협박이다. 그 다음 날 신하들은 하나둘씩 황제에게 ‘병권을 회수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한다. 조광윤이 병권을 모두 거둬들여 권력 기반을 다졌음은 물론이다.

역대 황제의 깊은 의심 속에서 생명과 자리를 유지했던 벼슬아치들이 도광양회식의 처세술을 발전시켰다는 시각은 조광윤의 사례에서 보면 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권부에서 벌어진 처절한 권력 다툼에서만이 아니다. 중국인의 삶이 이뤄지는 다양한 영역에서 이런 처세술과 상황 인식은 고루 엿보인다. 이는 먼저 성어의 세계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선 ‘바람을 보고 키를 다룬다(看風使舵)’는 말이 있다. 외부의 형세를 먼저 읽고서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정하자는 강한 뜻을 담고 있다.

돌아가는 기운을 보면서 일을 벌이자는 뜻의 ‘견기행사(見機行事)’도 마찬가지다. 늘 변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함부로 떠벌리거나 자신의 입장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권고다.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라는 뜻을 담고 있는 ‘수파축류(隨波逐流)’도 그 축에 들어가는 성어다. 물결과 흐름을 따라 함께 흘러간다는 말이다. 주변의 분위기나 전체를 이끄는 대세가 무엇인지 먼저 읽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남이 다투는 것을 먼저 본 뒤 거취를 결정하자고 부추기는 성어도 꽤 있다. 우선 ‘산 위에 앉아 호랑이 두 마리가 다투는 것을 보다(坐山觀虎鬪)’라는 말이다. 사납고 용맹한 호랑이와 직접 싸우는 것은 힘에 겹다. 먼저 산 위에 올라앉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게 옳은 순서다. 두 마리가 서로 싸워 한 마리가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분명 기진맥진했을 게다. 그때 나서면 두 마리 호랑이 다 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다.

그래서 중국인의 사고 영역에는 ‘회색지대(gray zone)’가 넓게 형성돼 있다. 어느 세력권에 속해 있는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국가나 세력을 일컫는 국제정치학의 용어지만 중국인의 사고와 행위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말이다. 언어와 행위 일반, 사고 등에 골고루 숨겨져 있는 이 회색지대를 읽어야 중국인의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