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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왕푸징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베이징의 재건축이 활발하다. 도심의 많은 四合院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과거와 인연이 없는 새로운 고급호텔이나 고급 상점가가 들어서고 있다. 옛 후통(胡同) 대신 새로운 거리가 생겨 났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베이징의 얼굴은 크게 달라졌다. 아마도 베이징의 옛 도심 東城區에서 태어나 해외에서 한 10년정도 살다 베이징에 돌아오면 자기가 살던집과 주변이 흔적도 없이 사라 졌음을 알고 크게 실망할 것이다. 베이징태생이 이방인처럼 베이징에서 길을 잃는다.
베이징의 재건축으로 크게 변화되고 있는 지역의 하나가 왕푸징(王府井)이다. 왕푸징은 역사의 부침으로 그 얼굴이 달라왔다. 왕푸징은 600년 전만해도 이렇다 할 지명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元의 大都는 현재 베이징보다 북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元을 멸망시킨 朱元章이 한 때 세계의 수도였던 大都에 입성(1368), 이름을 北平으로 바꾼다. 그리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남경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다. 그러나 불과 40년후 그의 넷째아들 朱棣(후의 영락제)가 왕자의 난 (靖難의 역)을 일으켜 자신의 조카였던 황제를 추방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리고 수도를 다시 자신의 세력기반인 북평으로 옮긴다(1404).
영락제는 대도성의 남쪽 광활한 터에 지금의 자금성을 짓고 그 이웃에 王府를 짓는다. 그리고 중국 각 지역에서 군권을 쥐고 있던 자신의 라이벌이자 형제인 친왕들을 강제로 베이징에 살도록 하였다. 더 이상 자신에 저항하는 왕자의 난을 막는 일종의 인질 작전이었다. 자금성 동편에 10여개의 王府 건설에만 3년반이 걸렸다고 하고 그 많은 왕부를 모두 합치면 자금성과 비슷한 규모로 방수만 8,350개 였다고 한다. 사실 왕부가 자금성의 東安門을 사이에 둔 인근이므로 감시하기에도 좋았다. 이렇게 하여 베이징에 처음 王府라는 지명이 생겼다.
明末 亂을 일으킨 군대는 농민군이고 그 우두머리가 李自成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베이징성에 들어오자마자 王府부터 약탈하였다. 그곳에 살던 왕족들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明의 국경수비대 사령관 吳三桂가 조국을 배신하고 난공불락의 산해관 성문을 활짝 열어 준다. 淸의 군대가 파도처럼 北京성에 입성 李自成군을 몰아내었을 때 王府는 약탈과 방화로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청조는 明王府였던 폐허를 정리하여 연병장을 만들었다. 과거 온갖 사치와 富가 넘쳐나던 왕부에 황실 근위병인 팔기군의 훈련으로 매일 군마의 소리가 인근을 진동하였다고 전한다.
王府井이라는 지명은 청대에 이곳에 우물이 발견되고 그 물맛이 유명하여 일반인에게 팔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옛 우물터가 보존되고 있다.
청말 외국인이 들어오고 대사관이 인근 東交民巷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고급상점이 동교민항 쪽에 생겨났다. 청말에는 태평천국의 난과 의화단 난으로 황실 근위병 팔기군도 동원되었다. 왕부의 연병장은 이미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지 오래였다. 동교민항과 가까운 이곳에 호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서민대상으로 하는 노점상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의류 잡화 식품 고서등 심지어 짝통 골동품이며 장물도 거래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남대문시장을 기억하듯 옛 베이징 시민들은 왕푸징을 잡화시장으로 기억한다. 중국이 개혁 개방되면서 화교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화교들은 베이징의 상권지역으로 왕푸징을 주목했다. 화교자본이 왕푸징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새로운 명소로 태어난다. 5성급호텔이 즐비하고 고급 백화점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토오쿄의 긴자(銀座),서울의 명동같은 왕푸징의 화려한 부활을 이야기 한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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