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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좌파 민족주의의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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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좌익사상과 민족주의는 원래 서로 상극이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 등 좌익사상의 원조들은 모두 철저한 국제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한편 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구호는 어디까지나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자본주의 열강의 민족주의 구호에 속아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코민테른, 즉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란 이들의 이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 열강이 서로에게 총포를 겨누면서 가공할 살상과 파괴를 저지른 행위를 직접 목격하면서 세계의 좌익계열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국제주의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오늘날에도 서구의 좌익 정당들이 국경을 넘어 협력을 도모하는 것도 이러한 이념적 바탕과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좌익과 민족주의는 원래 상극

그런데 우리나라의 좌파는 유난히 민족주의를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다.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우파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고 자본주의를 통해 이웃을 수탈하는 체제 앞에서 '항일'은 곧 좌익을 뜻하였다. 더욱이 일제하에서 국내의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자들이 '민족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 곧 일제와의 일정한 타협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기에 자본주의는 곧 친일로 간주되었다. 또 자본주의자들이나 부르주아보다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끝까지 일제와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일제시대를 통해 많은 사람은 우파 민족주의나 자본주의적 민족주의를 모순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됐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좌익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해방정국 하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와 지식인, 학생들이 좌익사상에 몰입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이들이 보기에는 북한이야말로 좌파민족주의에 입각한 '정통성'을 갖춘 체제를 수립하였다. 김일성이 "노동자의 천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민족해방 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좌파와 민족주의가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그러나 좌파민족주의가 실패하였다. 미국의 힘을 빌린 우파가 '대한민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건설해 나가기 시작했다. 좌파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반민족적인 체제가 건설된 것이다. 이 체제가 독재와 쿠데타, 빈곤과 저발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좌파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만이 이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남한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도 이들은 자신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곧 인민의 수탈을 뜻했다. 더구나 그러한 체제가 미 제국주의의 군대 뒤에 숨어서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더욱 좌파민족주의에 매달렸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가 나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미 제국주의를 추방하자는 주체사상이야말로 좌파민족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부적합한 이념 이젠 버릴 때

그러나 놀랍게도 남한의 우파적 자본주의 체제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그처럼 수탈적이었던 자본주의가 점차 거대한 중산층을 생산해 내면서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 중산층이 민주화운동에 가담하면서 그처럼 단단해 보이던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졌다. 반면 주체사상의 원조인 북한은 노동자의 천국을 건설하는 데도, 민족의 해방을 도모하는 데도 실패한 그야말로 '실패한 국가(Failed State)'가 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한국의 좌파민족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이념을 용도폐기할 때가 되었을 법도 하다. 좌파민족주의는 과거 우리 민족이 가장 불운하던 시절, 또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들이 노정되던 시절 일시적으로 적합해 보였던 이념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한국의 이념은 부르주아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우파 반동'사상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의 번영과 통일을 도모할 수 있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