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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주가 만난 한국의 리더들 6 장영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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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세계적인 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여섯 번째로 만난 한국의 리더는 장영신(73) 애경그룹 회장이다. 장 회장은 조그만 비누회사를 2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키운 국내 대표적인 여성 경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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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그룹에서 운영하는 서울 삼청동 몽인아트센터에서 지난 11월 6일 장영신 회장을 만났다. 몇 달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외부 활동을 자제한 그에게는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임형주씨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평소 손녀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첫째 손녀인 채문선(채형석 애경그룹 총괄 부회장)씨는 임씨와 예원학교 성악과 동기로 10년지기 친구다. 아끼는 손녀 친구라서일까. 장 회장은 편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부터 여성 CEO로 살아온 삶을 들려줬다.

임형주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찮으셨다고 들었어요.

장영신 4월에 암 수술하고 많이 아팠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처음에는 잘 걷지도 못했거든.

임형주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얼굴색은 많이 좋으신데요.

장영신 아프기 전까지는 굉장히 건강했지. 지금도 나이에 비해 빨리 낫고 있다고 의사가 그러더군요.

임형주 다행입니다. 회장님이 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데 맞나요?

장영신 하하. 초등학생 때는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어요. <우리의 소원> 작곡가로 유명한 안병원 선생님이 합창단 ‘봉선화 동요회’를 만드셨는데 그때 단원으로 활동했었죠.

임형주 어쩐지 성악하시는 분들처럼 목소리가 좋아요.

장영신 실제로 대학 때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그 공연을 했을 때 저를 지도한 교수가 오페라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죠. 당시 나는 미국 체스넛힐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있었어요. 미국은 공부만 해서 안 되니까 2학년 때 합창단에 든 거지.

임형주 당시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거의 없었겠네요.

장영신 1955년부터 59년까지 필라델피아에 있었는데, 남학생은 많았는데 여자는 없었어요. 여자 유학생이 도착하는 날에는 남학생들이 차를 타고 ‘어떤 여자가 왔나’구경하러 올 정도였지.

임형주 그럼 회장님 때문에 설레던 남자도 많았겠어요.

장영신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공부하느라 바빴어. 그때는 재정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여유는 없었어요. 하여튼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 1년 전에 합창단 오디션을 했는데 필라델피아의 오페라하우스 뮤지컬 책임자가 나를 지목해서 노래를 시킨 거야. 유일한 동양사람이 있으니 눈에 띈 거지. 그래서 그냥 했는데 덜컥 뽑혔어.

임형주 그래서 그 공연을 하셨다는 얘기네요?

장영신 그렇죠. 제가 주인공인 나비부인으로 나왔어요.

임형주 성악을 계속 해볼 생각은 없으셨나요?

장영신 이미 화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기는 아깝더군. 게다가 당시에 화학 전공자가 대우받던 시기였어. 또 유학을 온 목적이 그거니까 계속하는 게 좋을 거 같았지.

임형주 요즘 같은 시대였으면 하셨을까요?

장영신 당연히 했겠지. 그때는 너무 어렵고 힘든 때라…. 경영하면서 30년 이상을 노래와 먼 삶을 살다 보니 이제 노래를 못 부르겠어. 하지만 음악 듣는 건 여전히 좋아해요. 일할 때도 항상 클래식을 듣지.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좋아요.

임형주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있으신가요?

장영신 클래식은 다 좋아해요. 가끔 가요도 듣고요. 팝송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는 즐겨 듣죠.

임형주 목소리가 아름답죠. 러브 미 텐더도 그렇고요.

장영신 아…. 러브 미 텐더 참 좋지.

임형주 문선이가 할머니에게 음악 재능을 물려받았나 봐요.

장영신 문선이는 재능이 있어요. 알겠지만 목소리가 예쁘잖아요.

임형주 듣던 대로 많이 예뻐하시네요.

장영신 첫 손녀라 그런지 유난히 예쁘네요. 난 그 애 말이면 꼼짝을 못해요. 하하하(그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임형주 조금 얘기를 돌려볼까요. 결혼하신 후 집안일만 하시다가 1972년 CEO로 변신하셨죠. 회사 첫 출근 날 기억나세요?

장영신 뭐, 부끄러웠지. 그때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시절이거든. 환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당시 친오빠가 사장이었는데 내가 경영을 맡겠다고 하니까 ‘여자가 어디를 나오느냐’고 반대하더라고. 그럼에도 회사에 나갔고 오빠는 회사를 그만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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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회장(왼쪽)이 미국 유학 시절 학교 합창단의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에서 공연하는 모습. 2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 등이 모인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총회. 장 회장이 유일한 여성 CEO다.

72년 첫 출근 땐 참 부끄러웠지

임형주 다들 반대하는데 회사를 맡은 이유가 있나요?

장영신 남편이 죽었을 때가 큰아들이 만 열 살이고, 막내는 태어난 지 4일 지났을 때야.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1년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 아들 셋에 딸 하나 낳았으니까 자녀를 잘 키우는 게 어머니로서 첫 번째 몫이고, 두 번째는 큰아들이 성인이 돼서 가업을 이을 때까지 회사를 잘 지키는 게 내가 할 일이더군.

이건 부끄러운 얘긴데 난 집안일은 안 했어.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가 여럿 계셨거든. 그래서 더욱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게다가 비누회사는 내가 전공한 유기화학이라 자신 있었거든.

임형주 회사 경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는데 힘드셨겠어요.

장영신 지금도 자주 얘기해요.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다고. 무식이 나한테 이런 용기를 준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임형주 게다가 자녀도 키우시고…. 정말 바쁘셨겠어요?

장영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한 적이 없어요. 책임감이 있었지. 게다가 선천적으로 건강해서 잘 버틴 거 같아요.

임형주 처음엔 힘들다고 하셨지만 애경을 중견그룹으로 키운 건 회장님 능력이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게 CEO 마인드가 있구나’라고 느끼지 않으세요?

장영신 그런 건 없어요. CEO는 힘들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CEO가 됐는데 잘못되면 여성의 수치라고 생각했지. 꼭 성공해서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경기여고 동창들도 “네가 잘못되면 학교 망신”이라고 열심히 응원해줬지.

임형주 직원들도 잘 따라줬나요? 수십 명의 남자 직원을 이끄는 게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장영신 글쎄요. 전 일할 때 ‘난 여자고 상대방은 남자’라는 그런 의식이 없어요. 일로만 생각하고, 일로 해결하죠. 일을 하다 모르겠으면 기안서를 작성한 직원을 불러서 취지가 뭔지 등을 물어보면서 배웠죠. 배우면서 하는 거지 뭐. 그래도 남자 CEO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럽지 않았을까? 결재판 던지고 때린 적은 없었으니까. 하하. 내 생각에는 여성이고 어머니였기 때문에 사랑이 있었을 거 같아. 직원을 챙기고 배려하는 그런 마음 말이죠.

임형주 뵙기 전까지는 여걸, 여장부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아주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도 그렇고 부드러우세요.

장영신 아니. 실제로는 굉장히 강해(이 얘기를 한 순간 얼굴의 웃음기가 가셨다). 강하니까 이렇게 살아남지. 그 사회에서 버틸 수가 없죠. 난 외골수야. 한 길만 보지. 이랬다가 저랬다가를 잘 못해요.

임형주 회장님께서 한 일간지에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본인 백화점에서도 물건을 살 때 꼭 3개월 할부를 하신다고요.

장영신 ‘돈은 버는 만큼 잘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기 위해 쓴 건데…. 회사 경영을 할 때는 CEO지만 집으로 들어오면 평범한 주부야. 마찬가지로 백화점을 가면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고 보는 거지. 세일은 언제 하는지, 깎을 순 없는지 등등 다른 소비자와 똑같아. 근데 요새는 일시불로 계산해요. 3개월 할부 하다 보니까 더 많이 사는 거 같아.(웃음)

임형주 회장님이신데 너무 소박한 거 같아요.

장영신 멋 낼 줄도 몰라요. 치장하는 것도 일이 바쁘니까 신경 쓸 새 없어요. 출장가면 아이들 선물 사오고 싶잖아. 근데 우리 얘들은 “제발 선물 사오지 말라”고 해요. 제가 유행을 너무 모르니까 선물이 너무 촌스럽다는 거야. 하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뭐.

임형주 돈뿐 아니라 시간 개념도 철저하다고 들었어요.

장영신 우리 집안 사람들은 시간에 늦는 법이 없어요. 보통 10분 이상 일찍 다니죠. 제가 자주 가는 식당이 있는데 하루는 식당 사장이 “남자가 초대하는 자리에도 왜 매번 먼저 와서 기다리느냐”고 묻더군요. “습성이라 상관없다”며 웃고 말았죠. 시간 관리도 경영의 한 부분이에요. 늦지 않는 게 좋죠.
묻지도 말고 알아서 경영하라

임형주 조그만 비누회사로 시작한 애경이 중견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생활용품뿐 아니라 유통, 부동산, 항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넓히고 있는데요.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장영신 이제 경영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어요. “묻지도 말고 알아서 하라”고 하죠. 현재 큰아들이 총괄 부회장을 맡고 있고, 오래 계시던 분들이 계열사 사장으로 있어요. 화학 부문을 맡고 있는 부규환 부회장이 대표적인 예죠. 86년에 그룹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2006년 12월에 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으니까. 일 잘하는 직원은 열심히 밀어줍니다. 그래야 노력을 하죠. 회사는 한 사람 힘으로 크는 게 아니에요. 리더와 종업원들이 합심해서 만들어가는 거죠.

임형주 그래도 애경그룹에 대한 애착이 클 거 같은데요.

장영신 유통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관여했지만 항공, 부동산 개발 등 신규사업은 2세들이 한 거예요. 일단 물려주면 자기 소신과 책임 아래 하라고 합니다. 상관하지 않죠. 이제는 자기들 운이죠.

임형주 그렇다면 자녀들을 CEO로서 평가해 주신다면….

장영신 나보다 낫죠. 그럼요. 난 구식인데 요즘 시대에 필요한 경영방식이 있는 거죠.

임형주 자녀들에 대한 믿음이 크신데요. 특별한 교육방식은?

장영신 글쎄요. 나는 교육이라는 게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애들이 저를 보고 느끼는 게 참교육이죠. 아이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에요.

임형주 그렇다면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보람된 부분은 뭔가요.

장영신 (1분간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다.) 애들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떠났을 때 좋은 어머니가 돼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남편이 창업한 회사를 아이들에게 물려줘야겠다고 결심했죠. 그게 다 이뤄졌네요. 감사하죠. 70년대 초 처음으로 제가 경영을 할 때만 해도 비누 만드는 회사가 10개는 있었어요. 지금은 LG와 우리밖에 없어요. 그때 비누 회사 사장들은 얼마나 똑똑하고 발랄한지 숨도 크게 못 쉬겠더군요. 그런 분들이 다 안 됐더라고요.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종업원들과 협조해서 정말 열심히 일했더니 하늘이 도와주네요.

‘몸뻬’입고 경영 나선 여성 1호 CEO

장영신 회장은 국내 여성 1호 CEO다. 미국 체스넛힐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1972년에 경영에 나섰다. 70년 애경유지 창업주였던 남편 채몽인 사장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타계하자 36세 젊은 나이에 CEO가 된 것.

여성 차별이 심했던 시절 그는 꿋꿋하게 회사를 키워냈다. 당시 대표적인 브랜드가 국내 최초의 주방세제 ‘트리오’다. 현재까지 같은 이름으로 잘 팔리고 있다. 이후 퍼펙트, 스파크 등 세제와 케라시스 샴푸, 덴탈클리닉 2080 등 잘 알려진 생활용품뿐 아니라 유통, 부동산 개발, 항공 등 사업 분야를 넓혔다.

현재 애경그룹은 20여 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총자산은 3조원대. 그의 성공 비결은 성실과 뚝심이다. 경영 일선에 있는 동안 그는 모든 일을 제치고 회사일에 미쳐서 살았다. 매일 새벽 5시 전에 깨어나 조간신문을 정독하고 비서보다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경영이 기반을 잡던 90년 중반까지 틈 나는 대로 시장조사를 다녔다. 명절 연휴에는 아예 작정하고 지방을 돌았다. ‘몸뻬’스타일의 헐렁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서면 아무도 장 회장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전남 목포, 여수, 순천, 경남 진주 등 평소에 바빠서 가지 못했던 남부지방의 크고 작은 수퍼마켓을 돌아다녔다.

애경 세제나 샴푸가 어떻게 진열돼 있고, 잘 팔리고 있는지 고객의 반응 등을 세세하게 조사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열심히도 하지만 업계에서는 그의 뚝심에 높은 점수를 준다. 오로지 화학 분야로 한 우물을 팠기 때문에 오늘날의 애경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기획/정리 염지현 기자·사진 정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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