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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래권 기후변화대사 “선진국·개도국 다리 역할, 한국이 하게 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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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한국을 대표할 외교통상부 정래권(55) 기후변화대사를 지난달 30일 만났다. 정 대사가 코펜하겐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그의 일성에 이번 회담의 의미가 압축 정리돼 있었다.“지구의 미래뿐만 아니라 한국의 외교 위상에도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발 온실가스 해법에 주목하라”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연 사회에디터홍혜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코펜하겐 회의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선진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도록 어떻게 국제협정으로 규제하느냐다. 또 개도국이 참여하도록 어떻게 유도하느냐다. 알다시피 선진국과 개도국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중국·인도도 동일한 의무를 져야 한다는 선진국과 기후변화의 주요 책임자인 유럽·미국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도국의 입장을 다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온실가스 배출량 외의 주요 논의 사안은.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지구온난화에 따른 피해 예방) 문제다. 기후변화협약은 선진국이 개도국이 보는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진국 내부의 입장은 다르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보상에 적극적인 반면, 미국은 부정적이다.”

-선진국의 역할뿐만 아니라 개도국의 참여도 중요할 텐데, 그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미국은 국제적으로 모든 국가가 법적인 구속력 있는 감축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틀을 만들어 모든 국가가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반면 중국은 ‘법적 의무’를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미국·중국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지금은 선진국의 경우 국제협약에서 약속한 감축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처벌에 준하는 제재를 받게 된다. 의무 감축국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 감축국이 아닌 한국·중국은 약속을 못 지켜도 제재는 없다. 국제적인 압력은 받겠지만 국제법적인 제재는 받지 않는다. 그래서 개도국들은 국내법적으로 노력하되 국제법적 제약은 받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선진국·개도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제안한 독특한 해법이 있다고 들었다. 그게 ‘감축 행동 등록부’라고 하던데….

“지금까지는 의무 감축국이냐, 아니냐를 두고 각국의 입장이 정해지는 흑백구조였다. 등록부는 자유 감축체제, 즉 법률적 의무를 져야 하는 선진국과 아무런 의무가 없는 개도국 사이의 중간 단계를 만들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개도국들이 각자 국내법을 만들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하도록 한다. 다만 무작정 자발은 아니고 그 여부를 국제적으로 검증하자는 것이다. 자체 감축 행동을 적은 국제 등록부를 만들어 지구촌 모두가 지구 살리기에 동참하자는 제안이다. 우리의 제안을 남아공과 중남미 국가들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한국의 자발적인 온실가스 감축안에 대한 국제사회 반응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자발적인 결단이 큰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제시한 ‘30% 감축’이라는 숫자는 유럽연합(EU)이 개도국에 제시한 2020년 배출전망치(BAU) 대비 15~30% 감축 목표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서 상징성이 있다. 인도나 브라질·멕시코 등은 선진국이 재원이나 기술 지원을 한다는 조건하에 목표량을 발표해 의미가 반감됐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순수하게 독자적으로 감축하겠다고 했으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를 계기로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앞서 나가지 않았더라면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 끌려 다녔을 것이다. 중국·인도보다 앞서 발표했다는 점에서 시기도 적절했다고 본다.”

-국제사회에서 한국도 선진국에 준하는 감축 의무를 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는데.

“많은 이들이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 의무 감축국이면 선진국, 비의무국이면 개도국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일본은 자꾸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는데 왜 의무를 지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의무 감축국에 속하느냐는 역사적인 책임, 즉 과거에 얼마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현재 국력이나 경제적 수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굳이 의무국에 포함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정부는 ‘녹색성장’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아 한국식 해법을 찾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 대표단의 역할은.

“미국 협상대표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보고 ‘해결책을 제시해 상황을 진척시키는 건설적인 파트너’라고 칭찬했다(6월 4일 AP통신).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 등 유수 해외 언론이 한국의 선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 보도했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결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다. 일본이나 미국 등 선진국 협상대표단 측을 만나면 한국이 나서서 중국과 다른 개도국을 설득해 달라고 말한다. 영국과 EU 측에서도 한국에 대화를 요청해 온다. 그만큼 한국이 두 그룹 사이의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허브 위치에 있는 것이다. 개도국의 참여 방식을 우리가 주도하게 될 것이다.”

-91년 외무부에 환경과가 생겼을 때 초대 과장을 하는 등 환경외교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한 것으로 안다. 어떤 경위로 국내에 생소했던 환경외교에 관심을 갖게 됐나.

“89년에 유엔환경계획(UNEP)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프레온가스를 규제하는 몬트리올 의정서가 국제 이슈로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상황과 현재의 기후변화협약이 비슷하다. 정작 프레온가스를 배출해 오존층에 구멍을 뚫은 건 미국·일본·유럽 국가였다. 그런데 정작 당한 건 갓 반도체산업을 시작한 한국이었다. 프레온가스 대체물질 개발 기술을 확보한 선진국들은 다 빠져나가고 기술력이 부족한 우리만 걸려서 일시적으로 손해를 봤다. 그때 환경 문제가 곧 산업·경제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기후변화 문제가 터졌다. 과거에는 영토, 그 후에는 시장 점령을 두고 전쟁을 했다면 이제는 ‘환경 전쟁’에 돌입했다. 안보나 무역뿐만 아니라 환경 또한 외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정래권 대사는=1954년 인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10회)를 통해 공직에 들었다. 92년 리우 지구정상회의의 실무 대표였으며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 환경국장, 외교부 환경심의관을 거친 ‘환경 외교통’이다. 유엔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IPCC)는 지구온난화 보고서를 만든 공로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때 정 대사도 기술이전특별보고서 작성에 참여해 노벨 평화상 개인사본 증서를 받았다. 지난해 5월 초대 기후변화대사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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