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의 서울대 특강 ‘비워라, 그래야 채울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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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호 16면

박찬호와 관련된 내용이라 그의 거취에 관해 살짝 짚고 넘어간다. 그는 내년에 뛸 팀을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를 통해 조율 중이다. 현재 그를 원하는 구단은 6~7개 팀 정도. 현 소속팀 필라델피아가 있고, 동·서부의 명문 팀들도 있다(구단 이름은 거명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이번 주 윈터 미팅에서 스토브리그 최대어 로이 할러데이가 어느 팀으로 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윤곽이 잡힐 거라고 했다. 어느 팀으로 가든 내년 만 서른일곱이 되는 ‘코리안특급’을 메이저리그에서 더 볼 수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다.

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138>

그는 지난달 26일 서울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내가 경험한 메이저리그’라는 주제였다. 그 강연을 듣기 위해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섰고, 4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에 입장하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그날 그는 자신이 뛰었던 팀들을 하나씩 거명하며 그 팀에서의 경험을 통해 산업의 체계가 잡힌 메이저리그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과 도전,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며 재기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그날 그가 전한 메시지 가운데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텍사스 레인저스 이적 이후 ‘먹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던 시절, 그가 명상을 접하고 마음 수련을 통해 부진을 극복한 내용이다. 그는 “명상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습관’을 갖게 됐다. 그 습관을 통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 있고,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또 물었다. 비로소 ‘초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주라는 시골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저 야구를 잘하고 싶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를 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텍사스 시절 그는 많은 연봉과 높은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잘하려고’ 오버페이스를 했고, 그로 인해 부상을 얻었다. 재기에 성공하고 선발투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올 시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국가대표까지 반납하고 선발 후보로 스프링캠프에서 경쟁을 벌여 자리를 따낸 그는 시즌이 시작되면서 ‘이제 진짜다. 정말 잘해야 한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텍사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 부담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고, 야구는 더 잘되기는커녕 평소보다도 안 됐다는 거다.

그는 결국 선발 자리를 놓치고 불펜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불펜에서의 첫 경기에서 1이닝 4실점으로 최악의 투구를 했다. 그는 그 순간 ‘아, 이제 진짜 끝이구나’라는 생각에 은퇴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주위의 도움으로 또 한번 초심을 생각했고,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로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불펜 두 번째 경기에서 3이닝 무실점으로 되살아났다. 그 페이스는 월드시리즈 진출까지 이어졌고, 그는 리그에서 인정받는 투수로 재평가됐다.

두 번에 걸친 좌절을 이겨내고 특급의 위용을 되찾은 박찬호의 교훈은 뭔가. 그가 말한 것처럼 ‘집착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는 없다’다. 오히려 ‘지금 나는 작은 성공에 교만하지 않은가’ ‘지나치게 잘하려고 초심을 잊고 있지 않은가’를 묻는 게 현명하다는 거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채울 자리가 생긴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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