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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 칼럼] 권력 절제하는 정치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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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13총선에선 여당인 민주당도 선전(善戰)했다고들 하지만 의석 격차 18석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승리에 토를 달 수 없게 만들었다. 예측했던 대로 야당은 제1당이 되긴 했지만 과반수에는 미달했다. 어느 당도 국회를 자기당 뜻대로 이끌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여야가 대화와 협력의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점에서는 절묘한 의석 배분이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못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행태를 보면 자칫 정치가 한 발짝도 못나갈 수 있게 돼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총선 후 여당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 2년간의 정치는 정치도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렇게 된 데는 여야 모두에 책임이 있지만 국민들은 역시 국정운영을 책임지는 여당과 특히 대통령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번 총선결과가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여야가 총선민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총선 열하루만인 24일 열린 여야 영수회담은 건설적 여야 협력관계와 대화정치를 다짐하고 있다.

미국 사회를 관찰하면 권력은 절제하는데, 돈은 아낌없이 쓰는 데 그 아름다움이 있다고들 한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지만 권력구조 자체가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다 의회의 의석분포마저 대개는 여소야대였다. 대통령과 의회가 견제와 협력을 적절히 조화시키지 않고선 국정을 수행할 수 없게 돼 있다. 대통령이나 의회지도자가 권력을 과도하게 휘두르다간 닉슨 대통령이나 깅그리치 하원의장처럼 정치생명마저 잃는다. 힘은 절제하고 여야간 토론과 설득, 국민 앞에서의 정책경쟁으로 정치를 해나간다.

반면 기업인 중에는 열심히 번 돈을 자선사업, 학교.박물관.미술관 등 공공기관에 아낌없이 희사하는 경우가 많다. 무리하게 기업 경영을 자손에게 대물림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니 기업인 등 가진 사람에 대해 질시는커녕 존경의 분위기가 미국 사회에 뿌리깊은 것이다.

여대(與大)하의 우리나라 대통령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의 대부분의 문제가 바로 견제없는 무한권력에서 기인했다. 이제 모처럼 권력이 절제할 수밖에 없는 전기가 마련됐다.

여야는 이 기회에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완화하는 제도개혁을 공론화했으면 한다. 권력의 칼로 이용돼 온 검찰의 중립을 제도화하고, 경찰의 중앙경찰.지방경찰로의 이원화 공약도 조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감사원을 대통령 소속에서 국회 소속으로 바꾸는 것은 개헌사항이라 섣불리 논의하기 어렵지만 개헌문제가 제기될 때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명백히 불합리한 것으로 드러난 비민주적인 공천제도, 불공평한 선거운동 규제, 불투명한 정치자금 수수 등의 정치개혁과제는 가급적 올해 안에 입법조치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권력이 절제하기 위해선 야대(野大)하의 야당도 힘을 절제해야 한다.

2년 전 현정부 출범 때 총리임명동의 비협조가 권력의 야당의원 빼가기의 명분으로 이용됐던 일을 야당은 잊어선 안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선거결과는 돌고도는 양상을 보여 왔다.

지난 10년간만 해도 1990년 3당통합으로 국회의석이 개헌선을 넘겼던 당시 여당은 92년 14대 총선에서 과반의석도 못 건졌으나 그해 12월 대선에선 낙승했다. 그러나 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가 다음해 총선에선 선전했지만 97년 대선에선 패배했다. 그것이 이번 총선에서 또 뒤바뀐 것이다.

선거 승리에 취해 오만한 모습을 보이면 국민들은 가차없이 응징을 가하곤 해왔다. 집권자건 다수 야당이건 힘을 절제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협력하는 겸허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호랑이' 같은 국민들에게 여지없이 물어뜯긴다는 사실을 정치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병욱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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