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BOOK] 툭툭 튀어나온 천재들, 그들이 뒤집어 놓은 20세기 지성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교양’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갖추고 싶어하는 덕목입니다. 하지만 그 열망만큼이나 실체가 모호합니다. 세계적 작가나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혹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이 진정한 교양일까요?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즈음 교양 혹은 지성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할 듯합니다. 지성사를 다룬 책이 두 권 나왔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생각의 역사 2 -
20세기 지성사
피터 왓슨 지음
이광일 옮김, 들녘
1328쪽, 4만5000원

1913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아수라장 속에서 초연됐다. 팡팡 튀는 원시주의 리듬이 주는 충격에 객석에서 야유와 휘파람이 터져 나왔고 견디지 못한 작곡가 생상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리스 라벨도 벌떡 일어났는데, “천재다!”라고 소리 쳤다. 의견을 달리하는 관객끼리 시비를 벌이는 진풍경도 곳곳에 보였다. 얌전한 음향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클래식의 록’인 20세기 음향은 그렇게 쇼크였다.

당시까지 문화의 변두리이던 미국도 현대미술 쇼크로 감전됐다. 역사적인 아모리 쇼를 통해 에곤 쉴레, 피카소, 마르셀 뒤샹을 덜컥 만난 것이다. 전시회장은 포탄이 야적돼있고 황량한 천장을 천막으로 슬쩍 가린 뉴욕 인근의 69연대 무기창고(armory)라서 좀 어수선했다. 뒤샹의 콜라주(골판지 등을 이어붙이기)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는 “누더기 작품”이라는 혹평도 나왔지만, 하루 1만 명 관람객으로 대성황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가 “역사의 여신 클리오가 인간을 농락한 결정적인 해”이자 “풍요로운, 폭발적 한 해”(201쪽)라고 지목한 1913년에 일어난 문화사적 사건 두 개다. 인류는 코앞의 1차 대전과 러시아혁명을 알 리 없었고, 문화사의 빅뱅이 거푸 터졌다. 과학사의 혁명도 이 결정적인 해에 시작됐다. 아인슈타인의 머리에 일반상대성 이론의 첫 불꽃이 튕긴 것이다. 자연과학을 포함한 20세기 지성사인 이 책은 그 대목을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서술한다.

응용수학자 망델브로트는 1975년 해안선이나 눈송이의 윤곽에 나름의 규칙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프랙탈 현상’이라 이름지었다. 이 이론은 이후 과학 분야는 물론 경제학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혼돈스러워 보이지만 강력한 규칙이 숨어있음을 보여주는 사진. [들녘 제공]

“내가 알고 싶은 건 엘리베이터가 허공으로 떨어지면 거기 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거예요.”

그해 8월 아인슈타인은 함께 산책 중이던 퀴리부인의 팔을 붙잡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봄의 제전’에서 아모리 쇼, 아인슈타인까지 10여 쪽 분량에 그런 압축된 고급정보가 녹아있다. 예술이다. 지성사의 명장면의 윤곽을 포착해고, 그걸 서로 연결하는 솜씨는 장인의 것이다.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할 경우 밋밋한 백과사전식 정보전달에 그칠 법한데,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역사책, 맞다. 그러나 정치·군사 분야는 몽땅 열외다. 지난 세기의 위대한 지식의 모험이 주 대상이다. 가히 모든 것의 역사라서 출판계의 혁신인 문고판, 각종 이즘·주의 등 새로운 패러다임, 대중의 심금을 울린 유린 엘리엇·사르트르의 작품들, 라디오와 로큰롤의 등장, 인간 지놈 프로젝트, 생태학의 탄생, 에이즈, 인터넷의 탄생을 종횡무진한다. 지식의 종합선물세트인 이 책은 포만감(“안 봐도 배불러”)과 절망감(“왜 아직도 몰랐지?”)을 동시에 안겨주는 괴물 같은 책이다.

저자는 “우리 세기를 피로 물들인 참사를 접어놓는다면 지성의 도도한 흐름, 그 심오한 발전과정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하는데, 그런 역발상의 결과물은 경이롭다. 우리 세기가 위대한 이노베이션의 시대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서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까지 다룬 이 책 하나로 저널리스트에서 문화사가로 올라섰다는데, 그거 말 된다.

출판사의 ‘의도된 불친절’도 눈여겨봐야 한다. 일테면 책에 사진 한 점을 찾아볼 수 없다. 여느 책에는 두 세 쪽 건너 나오는 중간제목도 배치하지 않았다. 그게 보통 책 4~5권 분량인 13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의 컨셉이 아닐까? 활자상품의 자존심을 살려 독자가 충분히 집중하고 스스로 흡수하라는 당당함이다.

그러나 모든 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한국독자들에게는 서양 중심주의가 거슬린다. 곳곳에서 비(非)서구를 배려하는 척 하기 때문에 더욱 얄밉다.

“예술·교양·과학이라는 보석이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나 행동양식을 바꾸게 할 만한 법률이나 의학·기술이 드러난 적이 있는가? 새로운 문학, 새로운 비전을 가진 철학이 있는가? 좀 퉁명스럽지만 답은 ‘노!’이다.”(1179쪽)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서구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서구중심주의의 역사상을 뒤흔들었던 1922년 이집트 투탕카멘 발굴, 잇단 우르(이라크 북쪽)의 수메르 유적 발굴을 소개하면서도 그 가치를 야금야금 깎아 내리는 걸 보면 거북하게 읽힌다. 서구 역사학을 뒤흔든 마틴 버넬의 명저 『블랙 아테나』(1987년)를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의미를 서술하는 대목 역시 썰렁하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읽어야 할 게 이 책이다.

지난여름 먼저 나온 『생각의 역사1』(19세기 이전 지성사)과 한 짝이지만, 독립된 읽을거리로 봐도 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