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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너의 길을 만들어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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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 서명숙씨는 본래 제주도 서귀포 출신이다. 어린 시절엔 갑갑하게만 여겨지던 그곳을 얼른 벗어나 휘황한 불빛과 높은 빌딩이 즐비한 서울로 가기를 고대했었다. 그녀는 고향 제주에서 산 것의 갑절이 넘는 30년 이상을 서울에서 살았다. 대학을 마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다니던 직장에서 편집장 자리까지 차고 앉아 봤다. 하지만 그새 그녀의 몸과 맘은 만신창이, 삭정이가 돼 있었다. 그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스로 백수가 된 후 성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고 1000년 넘게 수많은 가톨릭 신자가 순례했으며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길, ‘산티아고 길’ 800㎞를 자신의 치유를 위해 걸었다. 2006년 9월, 그녀 나이 50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때였다.

# 산티아고 길의 막바지 여정에서 그녀는 영국인 길동무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이제 너는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너의 카미노(길)를 만들어라. 나는 나의 카미노를 만들 테니.” 이 한마디가 그녀를 감전시켰다. 그리고 저지르게 했다. “산티아고 길이 성 야고보의 히스토리(history)가 숨쉬는 길이라면 나는 설문대할망과 그녀의 후손인 해녀들의 허스토리(herstory)가 담긴 길을 만들겠노라”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바로 지금 나와 너, 우리가 함께 걷는 제주올레다.

# 제주올레는 차로 30~40분이면 갈 거리를 하루 종일 걷는 느리고 더딘 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살아 있는 숨이 있고 넘실대는 생명이 있으며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승리와 성공의 견인차처럼 둔갑한 빠름이 결코 대신할 수 없고, 결국 따라잡을 수도 없는 것이 실은 느림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 생명의 수호자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주올레의 진면목이다. 본래 생명은 느린 것이다. 느린 것이 삶을 잉태한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삶은 숙성된다. 이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제주올레를 걸어야 할 진짜 이유다.

#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것을 차 타고 가면서는 결코 할 수 없다. 걸으면서 땅을 딛고 가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허공에 떠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며 호텔과 골프장에만 처박혀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걸어 봐야 느끼고 헤매 봐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빨리빨리’ 허둥대며 바삐 돌아가는 이들에겐 숨겨진 비밀을 ‘간세다리(게으름뱅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대개 빠름은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한다. 반면에 느림은 더 많은 내려놓음을 가져온다. 가지려 하고 소유하려 하는 사람에게 느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려놓을 때만 우리는 느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느려진 사람에게 새 길이 보인다. 빨리 가려고만 하려는 사람은 이미 난 길 위에만 서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지 못한다. 세상에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 삶에 지쳤던 한 여인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 속에 만들어낸 제주올레. 그 더디고 느린 길 위를 걸을 때 바람과 파도가 내게 일러줬다. 삶이란 자기만의 길을 내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비록 느리고 더딜지라도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