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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8. 酒黨들의 천국

술버릇이란 것이 있다. 술을 마실 때나 술을 마신 후의 모습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쓰이는 말이겠다.

술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술꾼을 구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술꾼들을 주정파.한량파.실속파로 나눈다.

실속파는 하기 어려운 말이나 부탁을 접대라는 핑계로 술을 나누면서 은근슬쩍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부류다. 이런 사람들은 쓸데없이 심부름을 시키고 괜히 큰소리도 치곤 한다. 출판사에 갓 들어간 편집장이나 직원들이 대체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탑골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범한 고객이다.

한량파들은 탑골에 오면 늘 환영을 받는다. 술을 마시되 지나침이 없고 점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돌아가는 사람들인데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가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도 흘러간 옛노래를 순서에 따라 학예회 하듯 돌려 부르면서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말릴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이들도 가요파와 은근파로 나뉠 수 있겠다.

탑골에서 아무리 은근한 이야기를 해도 그럴 만한 대상이 없으니 그만이다. 기껏해야 갓나온 음담패설을 스무고개 하듯 하다가 마는 정도다. 가끔 나누는 이야기는 고담준론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심해야 '그 녀석' '그 자식' 정도이니 듣기가 그다지 거북하진 않다.

그러나 역시 문화예술계 술꾼의 대종은 주정파다. 이 주정파는 실신파와 통곡파. 주사파로 다시 나뉜다.

실신파는 마셨다 하면 끝내 실신, 가사상태가 되고 운구조가 동원돼서야 술이 끝나는 참 실신파와 소설가 현기영선생처럼 마셨다 하면 얼마 되지 않아 장소.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고개를 꺾고 잠을 자는 '꾸벅파' 가 있다.

통곡파도 두 가지 부류다. 혐오성 통곡파와 연민성 통곡파다. 술을 마셨으면 기분을 내고 놀 일이지 왜 우는 것일까. 그런데 그 울음이 아름다워 함께 마시던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울기 시작하면 일행으로부터 빨리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말을 듣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이 각박한 세상에 울 일이 있다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이 무섭기조차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주사파(酒邪派)에 이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소신성에 음모성. 무대책성 주사파까지 있다. 술을 마시다가 비위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소신을 가지고 주정을 해대는 '소신성 주사파' 는 그 소신을 만족시켜주면 잠잠해진다.

그러나 '음모성 주사파' 는 안에 숨겨둔 불만이나 원한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책을 세우기도 난감하다. 이름 밝히기는 뭐하지만 그런 예술인들도 많다. 어쨌든 이쯤 되면 가끔 빈 병이 탁자 위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고 마른 안주로 내놓은 말린 무화과나 오징어가 술에 젖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약간의 소란이 있을 뿐 한 두명의 의로운 어른에 의해서 얼마든지 진압이 된다. 그러고 나면 오히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술맛도 다시 나는 듯 하다.

그러나 어떤 어른도 소용 없고 심지어 실내에 걸려있는 그림마저도 그냥 둘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뛰며 난장을 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멀쩡하던 사람의 머리에서 '빨간 물' 이 나는 것을 보고서야 '광기' 를 멈춘다. 이런 '무대책성 주사파' 를 만나면 그렇게 하룻밤이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아니 솔직한 말로 질린다.

먼저 우리 실신파의 맹주, 집 쫓겨난 아이 해어름의 울음처럼 슬피 울던 소설가 김성동선생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복희<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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