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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도 주연 배우도 게임 속에, 나만의 상상으로 시나리오 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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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나리오 작가·영화 감독되다

지난달 26일 오후 7시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105호. 앳된 모습의 남학생 다섯 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이 앵글로 보니까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전정보·서울 강현중 2) “주인공이 말을 왜 타? 산책하는 장면인데 뛰어야지.”(강희배·서울 문창중 3). “뛰는 연기 연습을 더 해야겠어. 동선이 안 맞아.”(최중현·강현중 2) 놀고 있나 싶었는데 흡사 영화 촬영 현장에서나 들음직한 얘기가 오간다.

영화 촬영 수업이지만 현장에는 무비 카메라도 배우도 없다. 컴퓨터를 조작해 게임 캐릭터가 연기를 하고, 게임 속 가상의 카메라로 장면을 녹화한다. 게임 캐릭터가 등장인물인 애니메이션 영화다. “녹화 후 편집이 끝나면 직접 더빙을 해요. 게임으로 표현 안 되는 장면은 실제 우리 동작을 찍어 편집하죠.” 감독을 맡은 금민섭(강현중 2)군의 설명이다. 시나리오는 민섭군이 쓰고, 컴퓨터 조작에 능숙한 정보군이 촬영을 맡았다. “주제요? 의사소통의 도구인 휴대전화를 매개로 친구 간의 우정을 확인하는 내용이에요.”(금민수·강현중 1)

친구들과 ‘게임으로 영화 찍자’ 프로그램에 참여한 금민섭군. 휴대전화를 통해 친구의 우정을 확인하는 내용으로 영화를 제작 중이다. [황정옥 기자]

머시니마로 ‘미디어 리터러시’ 키워

학생들이 작업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머시니마(Machinima)’. 기계(machine)와 영화(cinema)의 합성어로 게임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이 프로그램의 운영을 맡은 ‘팩토리 36.5(하자센터 내 예비 사회적 기업)’ 양기민 대표는 “게임 세계관에 대해 토론하고, 직접 시나리오와 콘티를 짰다”고 설명했다. 게임을 하면서 학생들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촬영을 하는 것.

양 대표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미디어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미 해외에서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교육은 청소년들의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매체를 통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판단·평가하고, 이를 활용하는 능력)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네오위즈 정수영 과장은 “상상한 것을 화면으로 표현할 수 있어 실제 영화보다 표현 영역이 더 풍부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 10명이 이 방법으로 두 작품을 만들었고, 올 상반기에는 11명이 참여했다.

친구들 모여 ‘우정’ 주제로 한 영화 제작

학교 선후배, 친구 사이인 이들은 두 달 전 ‘게임으로 영화 찍자, 워로드’ 워크숍을 시작했다. 교육은 하루 2시간 10회에 걸쳐 진행 중이다. 영화 이론, 시나리오 작성, 콘티 만들기, 장소 섭외, 촬영, 연기 연습, 편집까지 배운다. 이날은 촬영 수업.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팩토리 36.5 성지은씨는 “실제 영화 제작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정보군은 “모든 게 새롭지만 얘기를 짜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영화 촬영에는 장소가 필수. 머시니마는 롤플레잉 게임이 많이 사용된다. 등장인물(캐릭터)들이 게임 속 공원 등 넓은 공간에서 연기와 촬영을 하는 것이다. 성씨는 “학생들이 게임 속 세계관을 배울 수 있게 하려고 『삼국지』가 배경인 게임을 활용했다”고 덧붙였다.

온라인 게임이다 보니 재밌는 일도 많다. 정보군은 “가끔 다른 게이머들의 캐릭터가 촬영장에 나타나 NG가 난다”고 어려움을 말했다. 이럴 땐 영화처럼 깔끔하게 편집하면 된다.

친구 관계 좋아지고, 영화 감독 꿈 생겨

민섭군의 꿈은 영화감독이다. 이번 작업에 참여하면서 새로 정한 꿈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하면서 원하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죠.” 양 대표는 “게임 개발이나 영화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직업을 경험함으로써 진로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동 작업을 하면서 학생들의 관계는 더 친밀해졌다. 민수군은 “각자 정한 역할을 제대로 완성해야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협동심도 생기고 얘기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상상력·창의력 발휘하는 기회 됐으면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게임’이라면 걱정부터 앞서는 게 현실. 한국게임산업협회 장현영 실장은 “게임을 활용한 작업이라 자기 주도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몰입’에서 나와 객관적인 시선으로 게임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해석이다. 문화사회연구소 김성일 소장은 “이미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문화가 됐다”며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하기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적극 활용하면 훌륭한 교육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 과장은 “머시니마는 하나의 문화 창작 영역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게임으로 영화 찍자’는 한국게임산업협회와 네오위즈·문화사회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진행 중이다. 하자센터 이지현씨는 “시작 단계라 소수의 학생만 참여할 수 있지만 향후 학교 단위로 신청을 받아 많은 청소년들이 경험해 볼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박정현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머시니마(Machinima)= 기계를 의미하는 ‘머신(machine)’과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의 합성어. 게임 엔진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플랫폼(캐릭터들의 촬영 현장)으로 롤플레잉 게임이 많이 사용된다. 캐릭터의 움직임을 동영상 캡처 프로그램으로 녹화하거나 녹화 카메라가 있는 게임을 이용한다.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해 목소리 더빙과 음향을 넣으면 스토리가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해외에서는 이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실행되고 있다. 최근 뉴욕에 학교가 세워진 ‘인스티튜트 오브 플레이(instituteofplay.org)’는 실제 교과서를 게임으로 대체하고 게임을 통해 교육한다. ‘게임 4 체인지(www.gamesforchange.org)’는 게임으로 사회 문제를 생각하고, 이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글로벌 키즈 프로젝트(www.holymeatballs.org)’에서도 머시니마 제작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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