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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반북 논쟁…국가 위태로운 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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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 김수환 추기경은 14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강론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최승식 기자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이 14일 정부.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대해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재확인했다. 김 추기경은 하루 전인 지난 13일 사제관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보안법 개정은 필요하지만 폐지는 힘든 상황"이라고 다소 우회적으로 발언했다. 그러나 이날은 두 시간에 걸친 강론과 미리 준비해온 메시지 낭독을 통해 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확실하게 천명했다.

이와 함께 김 추기경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참여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함께 밝혔다. 김 추기경은 이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명동성당이 공동으로 주최한 '하상 신학대학 강좌'에 강사 자격으로 참석, 2000여명의 신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강론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 김 추기경은 자신이 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일부 언론이 보도한 데 대해 "젊은 신부들이 보안법을 폐기하는 데 힘이 돼 달라고 할 때 다소 시기상조라고 말했었는데(보안법 폐지 지지) 명단에 나를 덜컥 넣었다"며 "그것은 나의 진의와 다르다"고 다시 한번 그간의 앞뒤 상황을 설명했다.

김 추기경은 강론 직후 신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에서 한 신자가 "추기경께서 '천주교 연대'의 이름으로 된 보안법 폐지 찬성 문건에 서명한 것처럼 알려졌는데, 과연 공식 입장은 무엇인지요"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준비한 보안법 폐지 반대 메시지를 2분여간 낭독했다.

김 추기경은 이 메시지에서 "제가 보안법 폐지에 동조하는 것으로 최근 알려져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이 기회에 제 입장을 확실하게 밝히겠습니다"라고 서두를 뗐다. 김 추기경은 "우리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남북 간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외려 한국 내부에는 친북과 반북 논쟁이 번지면서 국가가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라고 진단했다.

김 추기경은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최근 성명서를 낸 국가 원로들을 포함해 국민 대다수가 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는 현실을 깊이 감안해 평화와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보안법 폐지를 서두르지 말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라고 못박았다.

메시지 낭독이 끝나자 신자와 일반인은 큰 박수를 보냈고, 이에 김 추기경은 즉석에서 "이 박수 소리가 저쪽(청와대 쪽과 여의도 쪽)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발언해 더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메시지 낭독이 다소 미진한 듯 다시 "보안법은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필요합니다. 노 대통령께서 이 많은 민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결단 하나만으로도 그간 쌓여왔던 많은 것이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김 추기경은 이 발언 직후 기도를 자청해 1분여의 기도를 올리면서 "노 대통령께서는 세례도 받으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빕니다"라는 말도 했고, 기도 뒤 다시 박수를 받았다. 박수는 모두 네 차례나 나왔다.

한편 김 추기경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한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겠지만, 현재 북한은 체제가 더 경화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구할 것은 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 시대 어려워도 삶의 의미·용기 잃지 말아야"

김수환 추기경의 특별 강론 제목은 '삶이란 무엇인가'였다. 두 시간 강론 중 절반 이상 이 어려운 시대에 국민이 삶의 의미와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다음은 강론의 요지.

저는 오늘 '삶이란 무엇인가'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나라에 깊게 파인 분열의 골 때문에 이땅에 살기가 싫다고 이민 가는 이가 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국 사람들 때문에 집값이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외화도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이가 삶의 의미 자체를 잃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말 한국의 자살자 숫자는, 세계 최고라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많습니다. 왜 이렇게 존엄한 생명을 스스로 버립니까?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현장에서 유대인들이 불렀던 노래가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은 '예스'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선 생각의 180도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입니다. 또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자각과 사랑에서 우리나라는 참으로 빛나는 나라가 되며, 통일도 그 힘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조우석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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