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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석의 제작진은 당당한데 방청석 앉은 내가 죄인 같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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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민동석 전 농업통상정책관은 :공직자로서의 명예를 짓밟힌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신동연 기자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민동석(57) 전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차관보급)을 만났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민 전 정책관은 정운천 전 장관과 함께 12월 2일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명예훼손 형사소송 4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그는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법과 원칙을 세우고 후손에게 진실이 바로 서는 나라를 물려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민 전 정책관은 지난해 11월 친정인 외교통상부에 돌아와 외교역량평가단장을 맡고 있다. 그는 원래 외시 13회(1979년)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 5월부터 농림부에서 2년6개월 동안 한·미 쇠고기 협상을 비롯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농업 부문 협상을 지휘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격렬했을 당시 그는 이른바 ‘광우병 5적(賊)’ ‘매국노’로 몰렸다. 그는 2005년 휴스턴 총영사로 근무할 때 허리케인 카트리나·리타로 위기에 빠진 교민들을 끝까지 대피시켜 홍조근정훈장을 받은 30년 경력의 외교관이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를 꿈꿨다. 30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명예 하나를 붙들고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매국노로 몰려 명예가 짓밟힌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왜 소송을 시작했나.
“고위 공직자가 거대 언론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내 개인의 명예훼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국기(國基)가 무너진 사건이라 국가의 문제이고, 대한민국이 무정부 상태가 되었기에 정부의 문제다. 거짓으로 국민을 농락했기에 국민의 문제고, 거짓 선동가를 민주언론의 투사나 영웅으로 왜곡시킨 언론의 문제다. 내가 PD수첩 제작진을 검찰에 고발한 것은 후손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다.”

-PD수첩 내용도 언론의 자유라고 볼 수 있지 않나.
“PD수첩은 50분간 방송하는 동안 30곳 이상을 조작·변조·왜곡·과장했다. 유례 없는 허위보도였다. 그렇지만 단 한 곳도 스스로 수정하지 않았다. 진실한 사과도 없었다. 그런 방송을 했던 이유는 뭐였나. PD수첩 김은희 작가가 지인에게 보낸 e-메일에서 한 말이 있다.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서 더 그랬나 봐요’라는 내용이다. 이명박 정권의 생명줄을 끊어 놓으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미 쇠고기 협상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비판도 많았다.
“굴욕적인 협상이라거나 졸속 협상이라는 평가는 순전히 정치적인 공격이다.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에 따르기로 한 것은 2007년 4월 한·미 FTA 체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약속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대선에서 패배한 노무현 대통령은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려 하느냐”며 문제 해결을 미뤘다. 총선이 끝난 지난해 4월 협상 당시엔 미국 측에서도 더 이상 타결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다면 금융위기 극복의 중요한 계기가 됐던 한·미 통화 스와프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의 한국 개최 결정도 없었을 것이다.”

-2008년 국정조사에서 민 단장 스스로 ‘미국이 준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당시 야당 의원들은 쇠고기 협상을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에 바친 선물’ ‘카트비’ ‘숙박료’ ‘조공’이라고 공격했다. 나는 협상 대표로서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폭하는 심정으로 ‘선물을 주었다고 하면 우리가 미국에게 준 것이 아니라 미국이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이 우리에게 선물을 줬다는 말이 적절치 않다면 우리가 미국에게 선물로 바쳤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야당이 강력 반발하고 나는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그 후 ‘선물’ 논란은 사라졌다.”

-PD수첩이 아니었으면 촛불시위가 없었을 거라고 보나.
“2008년 4월 18일 협상이 타결됐고, 그 후 11일 동안 정부는 언론을 통해 협상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4월 29일 MBC PD수첩이 방영됐고, 5월 2일부터 촛불시위가 시작됐다. 그다음부터는 정부가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쇠고기 사태 때 어떤 일이 벌어졌나.
“전화로, e-메일로 형언하기 힘든 심한 욕설과 저주를 받았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욕설이 쏟아졌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선 내 허수아비가 불태워졌다.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우황청심환으로 버텼다. 당시 레바논 파병을 자원해 동명부대에 있던 아들이 전화로 ‘아버지, 흔들리지 마세요’라고 힘을 줬다. 딸은 ‘왜 아버지를 변호해 주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한 사람도 없느냐’고 물었다. 과학과 이성이 마비되고 괴담과 선동만 가득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해 7월 사직서를 제출하자 딸이 ‘아빠, 3년만 기다리세요. 제가 먹여 살릴게요’라고 했다. 나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던 가족에게 정말 미안하다.”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세 차례 공판을 했다. PD수첩 제작진들은 재판정에서도 자신들이 민주투사이며 영웅들이라고 착각하는 듯 여유 있는 태도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내가 오히려 죄인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상대는 15명의 변호인단을 꾸리고 재판에 임하고 있다. 나는 돈도 없고 조직도 없다. 변호는 친구인 엄상익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소송비가 없어서 무료로 해 달라고 했다. 1심 판결은 12월이나 내년 1월이 될 것이다. 1심에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항소할 것이다. 대법원까지 가겠다.”

-왜 그렇게 재판에 집착하나.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 금융위기 당시 외환은행 매각 문제를 담당했다. 몇 년 뒤 인수자인 론스타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기고 되팔려 하자 마녀 사냥이 시작됐다. 변양호 전 국장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날 때까지 3년3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 후 과천 관가에선 ‘덮고 미루고 떠넘기기’란 유행어가 나돌았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책임질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쇠고기 문제로 그런 분위기가 더 굳어질까 걱정스럽다. 공직자가 몸 사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제2, 제3의 PD수첩 사태를 막으려면 대한민국 국법이 살아있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혜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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