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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위협하는 '방송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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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목소리로, 또 'SBS 인기가요 20'등에서 독특한 내레이션으로 인기를 끌어온 성우 장정진(51.사진)씨가 TV 오락 프로그램 녹화 도중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장씨는 13일 오후 7시쯤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진행된 KBS-2 TV '일요일은 101%' 추석특집편 녹화 도중 송편이 기도에 걸려 쓰러졌다. 그는 술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번 외치는 동안 도시락 속에 담긴 송편을 모두 입에 넣어야 하는 '먹기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급하게 입에 넣었던 송편을 토해내다 실신하자 녹화 현장에 함께 있던 심권호.강병규씨가 인공호흡 등 응급조치를 했으나 장씨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곧바로 이대 목동병원으로 옮겨진 장씨는 목에 걸린 떡은 빼냈으나 현재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 병원 측은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동공이 열려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날 사고가 발생한 프로그램에서는 그동안 길이 30㎝의 가래떡 먹기, 삶은 계란 먹기 등을 같은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KBS 측은 14일 해당 프로그램 관계자 등을 소집해 후속 조치를 논의한 뒤 "사고가 난 코너를 없애고 앞으로 KBS에서 제작하는 모든 대형 게임프로그램에는 의료진 등 안전요원을 배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장씨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KBS 인터넷 게시판에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사고 위험이 큰 프로그램을 무리하게 기획한 방송사와 PD.작가를 비난하는 내용이 많았다.

시청자 조모씨는 "일본의 신년 떡 먹는 행사에서도 노약자들이 떡이 걸려 질식하는 사고가 빈번한데, 이렇게 급하게 먹는 경기에서 사고 하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건가요"라고 제작진의 안전 불감증을 질책했다. 또 박모씨는 "계속 이런 가학적으로 웃기려는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장정진님의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출연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프로그램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는 "방송사들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더 자극적인 소재를 찾다 보니 안전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녹화일정에 쫓겨 안전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는 제작 풍토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1999년 탤런트 김성찬씨는 KBS-2TV '도전지구탐험대'를 녹화하기 위해 예방약도 먹지 않고 라오스를 다녀온 뒤 말라리아에 걸려 숨졌다. 지난해엔 배우 심형탁씨가 SBS-TV '뷰티풀 선데이'에서 기왓장 격파 게임을 하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는 등 방송 녹화 중 연예인들의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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